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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평화 (61)

일곱 구멍은 욕망인가? 마음인가?

기세춘 (기사입력: 2004/12/31 00:43)  

질문

어느 유명한 교수는 이 일곱구멍 우화를 過恭非禮 즉 지나친 공손은 예가 아니라는 통속적인 처세훈으로 번역하고 유치한 해석을 붙여 인기를 끈 사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전혀 가당치 않는 오역이며 여기에는 중대한 인식론적 담론이 들어있음을 알았습니다.

다만 선생님처럼 일곱 번째 구멍을 “마음구멍”으로 해석한 학자는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올을 비롯한 모든 번역자들도 선생님과는 달리 일곱 번째 구멍을 “감각의 구멍”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마음구멍을 막아라!”는 해석에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동양사상이라면 모두 마음을 존재의 근원으로 알고, “마음공부”를 가장 중시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장은 이와 반대로 마음구멍을 막으라고 했다면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색태(塞兌)”를 “허심(虛心)”으로 해석한 것으로 이해됩니다만 이것은 마치 20세기의 데리다와 같은 프로이트적 구조주의적 인식론을 견강부회하여 억지를 부리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2300년 전의 더구나 소박한 민중적 담론인 동양의 노자를 서양의 언어학적 해석을 하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까요?

다시 말씀드리면 이 우화에서 “일곱구멍”을 이목구비의 감각기능으로 해석한다면 이런 복잡한 해석도 필요 없을 것이며 오히려 “욕망을 경계하라”는 소박한 도덕론이 될 것입니다. 저는 기존의 평범한 해석이 오히려 노자 본래의 듯에 적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답변

김박사님 말씀을 이해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본심을 찾아야 한다”는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자랐습니다. 이는 성리학적 영향입니다. 또한 불교에서는 온통 “마음공부”이며 그 나머지는 “무”라는 화두뿐입니다. 이제 기독교까지 나서서 마음타령을 합니다. 그리고 선생님도 방송도 신문도 아니 시정잡배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문화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고 떠들어댑니다. 그러므로 “마음구멍을 막으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그 마음이 선합니까? 악합니까?

만약 마음이 악하다는 성악설이 옳다면 “마음에 낀 티끌을 닦으면 닦을수록 악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누구도 성악설이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모두 유교 불교 기독교의 영향으로 성선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드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성선설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성악설이 틀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인성학습론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께서 이 물음에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지금까지의 마음공부에 대한 인식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학자들이 모두 노자의 구멍을 이목구비로 해석하는 것은 왕필의 영향입니다. 그는 兌를 ‘욕심이 생기는 곳’이라는 주를 달았습니다. 도올은 왕필을 따라 구멍을 耳-2 目-2 口-1 鼻-2 도합 일곱 구멍으로 보았을 뿐, 마음구멍은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또 도올은 “희랍인들이나 인도인들은 인간의 감관을 眼(시각),耳(청각),鼻(후각),舌(미각),身(촉각)의 5개 감각기관을 말했지만 중국인들은 五官이라는 개념 대신 7개의 구멍이라는 내외 통로개념의 형상적 인식만 있었다”고 말합니다.(도올노자/하권/155쪽)

그러나 그의 말과는 달리 중국인들은 어느 민족보다도 心官을 중시했으며, 또한 불교에서는 六識(육식)이라 하여 耳目口鼻 외에 身(피부감각)과 意(心官)를 주목했습니다.

만약 왕필과 도올처럼 해석한다면 이 우화는 감각이 열리면 道가 죽어버린다는 뜻이므로 경험론을 반대한 것이 됩니다. 뒤집어 말하면 감각으로는 도를 인식할 수 없으나 마음으로는 도를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노자를 자연주의 생명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唯心主義적 관념적 도덕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노자는 자연주의자이며 직관주의자일뿐 관념론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일곱 번째 구멍은 마음구멍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구멍을 뚫으면 도가 죽는다는 것은 반대로 마음구멍이 뚫려 관념에 물들여지면 무위자연의 도가 죽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필자는 왕필과 도올의 해석은 모두 노자를 공자의 아류로 왜곡한 것이므로 취하지 않습니다.

질문

한 가지 더 질문하겠습니다. 다른 학자들은 노장의 구멍은 욕망의 구멍인 이목구비라고 읽는데 반해 선생님은 거기에는 마음구멍까지 포함된다고 읽습니다. 그러면 마음도 욕망의 구멍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노장은 유가와 똑같이 인간의 욕망을 부정했습니까?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공자의 태제인 “克己復禮”에서 “극기”는 안으로 자기욕망을 극복하는 것이고, “복례”는 밖으로 주나라 禮를 부흥시켜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 선비들의 유일최고의 도덕적 강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봉건시대에 노자를 공자의 아류로 해석하는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모두가 노자도 욕망을 부정한 것으로 왜곡하여 해석해왔습니다.

그러나 청대에는 공자의 “극기”가 최대의 쟁점이었으며 거의 모든 학자들이 극기를 폐기하거나 수정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학자들은 지금도 공자의 극기를 고수하고 옹호하는 실정입니다.

아시다시피 공자는 욕망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노장은 반대로 자연적인 욕망을 적극적으로 긍정했습니다. 물론 노자도 공자처럼 “無欲”을 말합니다. 그러나 도덕주의자인 공자의 무욕과 자연주의자인 노자의 무욕은 다릅니다. 노자가 말하는 無欲은 공자의 克己와는 다릅니다. 노자의 무욕은 자연적인 욕심을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노자는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을 긍정하고 반면 착취욕 명예욕 지배욕 등 인위적인 욕망을 부정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노자의 “無欲”은 노자의 三德인 慈愛(묵자의 겸애, 공자의 인의에 대비됨)․儉素(묵자의 절용과 대비됨)․爲後(천하에 앞장서지 않음) 중에서 “검소”와 “위후”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노자의 無欲은 無爲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위는 밖이고 무욕은 안입니다.

노장은 聖人=至人=眞人=自然人을 童心으로 표현합니다. 동심은 무위 무욕을 표상합니다. 그는 동심에는 학대 착취도 없고 명예욕도 지배욕도 없는 자연 그대로이며 本性인 생명욕구와 평안만이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필과 도올처럼 욕망의 해방을 말하는 노자의 無爲의 無欲을 공자의 克己論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왜곡입니다.

다음 글들은 욕망을 긍정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왕필 이후부터 본 뜻과는 달리를 욕망을 부정한 것으로 왜곡 해석되었습니다.
(노자/1장):* 하단.
故常無欲而觀其妙 주:妙(묘)= 成也. 神化不測也.
*예문: 神也者 妙萬物而爲言者也(周易/說卦傳6).
神妙萬物(주돈이/通書/動靜 16)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으면 生命의 生成을 보고
(김경탁: 그러므로 항상 無慾함으로써 그 미묘함을 관찰하고)
(노태준: 그러므로 常無로서 묘(道의 實相)를 보려하고)
(도올: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오강남: 언제나 욕심이 없으면 그 신비함을 볼 수 있고)
(이석명: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도의 신비를 보고)
常有欲以觀其徼 주: 徼(요)=邊塞. 歸也. 循也.
항산 욕심이 있으면 생명의 돌아감(歸根)을 본다.
(김경탁: 항상 有慾함으로써 그 순환함을 관찰한다)
(노태준: 常有로써 그 요(현상세계)를 보려한다)
(도올: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만 본다)
(오강남: 언제나 욕심이 있으면 그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이석명: 늘 욕심이 있으면 道의 언저리만 보네)
此兩者同出而異名
이 둘은 같이 나왔으니 이름붙인 것은 다르지만,
(김경탁: 이 양자는 같이 나오고서도 이름을 달리하거나)
(노태준: 이 양자는 같은 근본에서 나왔으나 그 이름을 달리한다)
(도올: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할 뿐이다)
(오강남: 둘 다 근원은 같은 것, 이름이 다를 뿐)
(이석명: 이 둘은 같은 곳에서 나왔으니 이르만 달리할분이네)
同謂之玄 주:玄=幽遠也. 神也. 通也. 理之微妙者.
똑같이 신묘한 道라고 말한다.
(김경탁: 한가지로 玄妙라고 말한다)
(노태준: 이를 한가지로 말할 때 현(道)이라 한다)
(도올: 그 같은 것을 일러 가믈타고 한다)
(오강남: 둘 다 신비스런 것입니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신묘하고 또 신묘하니 모든 生成의 문이다.
(김경탁: 현묘한 가운데 또 현묘한 것은 모든 妙理의 문이다)
(노태준: 玄의 또 玄인데, 이는 모든 기묘한 것의 문이다)
(도올: 가믈고 또 가믈토다!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는가?)
(오강남: 신비 중의 신비요 모든 신비의 문입니다)
(이석명: 도는 가믈하고 가믈하니, 뭇 미묘한 것의 본원이네)

(노자/37장)
道常無爲 而無不爲.
道는 항상 無爲이나 爲 아님이 없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군왕이 무위의 道를 지키면 만물이 저절로 교화될 것이다.
化而欲作 . 주: 作=起也. 爲也
교화함으로써 人爲하려는 욕심이 일어나면
(도올: 교화와 더불어 욕망이 치솟을 것이다.)
吳將鎭之 以無名之撲也
나는 名分이 없는 무위자연으로 진정할 것이다.
(도올: 그러면 나는 무명의 통나무로 누를 것이다.)
無名之撲 夫亦將無欲
명분이 없는 무위자연은 역시 人爲에 대한 욕심이 없을 것이다.
(도올: 무명의 통나무는 대저 또한 욕망이 없을 것이다.)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내가 人爲의 욕심이 없어 고요하면 천하도 저절로 안정될 것이다.

(淮南子/道應訓) *노자/37장 해석
武王問太公曰
무왕: 태공에게 물었다
寡人伐紂天下
과인이 은나라 주왕의 천하를 토벌한 것은
是臣殺其主 而下伐其上也.
신하가 주군을 살해한 것이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벌한 것이니
吾恐 後世之用兵不休 鬪爭不已
후세에 군사를 함부로 일으키고 투쟁이 그치지 않을까 걱정이요,
爲之奈何.
어찌하면 좋겠소?
太公曰 甚善 王之問也.
태공: 좋은 질문이십니다.
夫未得獸者 唯恐其創之小也.
무릇 사냥할 때는 상처가 너무 작을까 걱정하지만
已得之 唯恐傷肉之多也.
사냥감을 잡고난후에는 고기가 너무 상하지 않았을까 걱정합니다.
王若欲久持之
왕께서 오래도록 지탱하려면
則塞民於兌
백성의 (마음의) 구멍을 막고,
道全爲 無用之事
도를 온전히 하여, 재화를 위한 노역을 없애고,
煩擾之敎. 주: 煩(번)=辱也. 無益者. 擾(요)=馴也(掌養猛獸而敎擾之-周禮).
순치를 위한 교화를 쓸모없게 하시오.
彼皆樂其業.
저들이 자기 직분을 즐거워하고
供其情昭昭 而道冥冥
그들의 실정은 밝혀주고 道는 어둡게 하시오.
故老子曰
그러므로 노자께서 이르기를
化而欲作 吾將鎭之 以無名之撲也. 주: 作=起也 爲也.
교화로써 인위가 일어나려하면
나는 명분이 없는 무위자연으로 진압하려 한다..

이처럼 [노자]와 [장자]에는 “欲”을 긍정하는 글도 있고, 부정하는 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欲‘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에리히 프롬의 생명욕구(리비도)에 대한 설명을 빌려보기로 합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생존본능을 충족시키려는 욕망이 있기 마련이나 그것이 인간으로 진보하려는 생산적이고 건전한 방향으로 충족하는 경향도 있는 반면 반대로 동물로 돌아가려는 퇴행적으로 충족하는 경향도 있다는 것이다. 뿌리는 같으나 방향이 다르다는 말이다.

그는 대체로 인간의 생명욕구를 관계성(關係性), 초월성(超越性), 귀속성(歸屬性) 정체성(正體性) 정행성(定向性)으로 구분하고 이 욕구들이 어떻게 두 가지 방향으로 달라지는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타인과 결합하고 관계를 맺으려는 본능적 욕구인 “관계성”은 그것이 진보적으로 지향하면 관심 존경 이해 사랑 등으로 나타나지만, 반면 그것이 퇴행적으로 나아가면 굴종 지배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특히 퇴행성이 지나치면 굴종은 메저키즘(masochism)으로, 지배는 새디즘(sadism)이라는 병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둘째, 자기의 운명과 한계를 초월하려는 본능적 욕구인 “초월성”은 그것이 진보적으로 나아가면 창조적 행위로 나타지만, 반면 그것이 퇴행적으로 나아가면 파괴적 행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셋째, 인간의 귀소본능인 “귀속성”은 그것이 진보적으로 나아가면 이웃사랑의 형제애로 나타나지만, 반면 퇴행적으로 나아가면 근친애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근친애는 자연법과 휴머니즘의 뿌리가 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나치즘이나 인종차별주의로 나타나며, 형제애는 평등과 공동체의 뿌리가 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국가주의나 총통주의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넷째, 자기동일성 또는 주체에 대한 욕구인 “정체성”은 그것이 진보적으로 나아가면 자유 주체 자급자족하려는 행위로 나타나지만 퇴행적으로 나타나면 이기주의 인기주의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자폐증이나 시장을 무조건 추종하려는 병증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치병 명품병 등이 그것입니다.

다섯째, 가치를 지향하려는 욕구인 “정향성”은 그것이 진보적으로 나아가면 종교 이념 헌신으로 나타나지만 퇴행적으로 나아면 광신 자기도취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상 프롬의 본성적 욕구를 대충 설명한 것은 그것이 정합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이른바 “욕”이라는 것의 이중성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생명욕구이므로 부정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인간의 운명입니다. 다만 그것이 인간의 생산적이고 평화적이며 진보적으로 충족되느냐 아니면 인간의 갈등과 파괴와 퇴보를 위한 방향으로 충족하느냐에 따라 선악이 갈라지는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장이 말한 “무욕”과 공자가 말한 “무욕”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피지 않으면 자칫 같은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학자들이 공자의 극기와 노자의 무욕을 같은 것으로 보는 왕필을 따르는 타성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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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약력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기대승 선생의 후손으로 1937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남. 전주사범학교 졸업. 전남대 법과 대학 입학. 4.19 혁명 적극 가담. {동학혁명 연구회} 창립.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창립.
저서로는 『천하에 남이란 없다-묵자』『우리는 왜 묵자인가』『예수와 묵자』『신세대를 위한 동양사상 새로 읽기』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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