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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호   (200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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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효의 네팔기행 (2)

고대 네팔 문화의 흔적을 타멜에서 만나다

김형효 (기사입력: 2005/01/09 15:59)  

2004년 6월 8일 한국시간으로 밤12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네팔시간으로는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막 잠들기 전에 내리기 시작해서 아침까지 밤새 비가 내렸다. 아침이 밝았다. 밀런의 아마(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네팔식 전통차(찌아)와 식빵을 가져왔다. 우리는 함께 둘러앉아 네팔의 일상적 아침 식사인 찌아와 식빵을 곁들여 먹으며 방문지의 이튿날을 맞이했다. 아침 일찍 걸바나가 찾아왔다. 무나의 친언니다. 밀런의 손녀인 슈르띠와 함께 찾아온 밀런의 조카 걸바나는 밀런보다 나이가 많다. 아침 시간 찌아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밀런의 누나 루빠동굴은 전날부터 쉬임없이 식사를 준비해주었다. 행여라도 손님들이 불편할까?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이었다. 여동생 럭스미도 바쁜 시간 속에서도 예민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웃는 아이, 엷은 부끄러움을 한 아이, 약간은 놀란 듯한 아이, 삼인 삼색이다. 사원의 아이들. © 김형효
네팔시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조금은 이른 점심식사를 네팔식으로 마치고 우리는 밀런의 안내로 타멜(Thamel)을 향해 걸었다. 타멜을 향해 걷던 중 무나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무나와 함께 타멜에 갈 것을 청했다. 무나와 우리 일행은 타멜을 함께 둘러보게 되었다. 전날 공항에서 오던 길을 상기하며 걸어가는 거리는 참으로 심난했다. 주택가의 번잡한 집짓기를 보는 것보다 절망적이었다. 을씨년스런 폐허였던 것이다.

마을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미니사원에 자신들만의 기원을 하고 있었다. 마을어귀나 집안 그리고 시장마다 사원이 있었다. 네팔말로 템벌이라는 사원에서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의식에 맞추어 몸에 밴 예식을 치르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의 카메라 세례에도 싫지 않은 기색으로 조금은 경이로운 눈빛을 보이며 찬찬히 바라보았다. 맨발에 두려움 없는 기색을 보며 아이들은 어느 곳에서 누구와도 자신들의 천진한 언어로 대응하는 생명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각할 수 있는 재료들은 모두 조각되어 있는 듯하다. 타멜거리에서... © 김형효
우리는 밀런의 친구 디네스의 누나가 운영하는 코닥칼라현상소를 찾았다. 직원만 일을 하고 있었고 디네스의 누나는 만날 수 없었다. 내가 디네스를 처음 만난 것은 세 달 전이다. 동대문에 있는 뿌자레스토랑에서 한국에서 일하다 고향 네팔에 비자연장을 위해 일시 귀국하는 친구를 배웅하러 나왔을 때 밀런으로 부터 소개를 받았다. 그는 의정부 송우리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 자리에 친구들에 의해서 그는 친구들에게 꼬리연이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사실 디네스의 얼굴 생김은 여지없는 한국인이다.

평소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네팔인 친구들의 집이나 그의 가족들을 꼭 만나보고 사는 집에 들려보고 싶었는데 마침 디네스 누나의 가게가 타멜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직원과 몇마디를 나누던 밀런은 근처에 있는 히말라야은행에서 은행업무를 잠깐 볼 일이 있어서 히말라야 은행에도 함께 갔다.

타멜거리에 상점! 상점 안에도 미니 사원이 있다. © 김형효
시내 중심지에 속하는 은행에서 밀런과 그의 조카 무나는 정복을 한 경찰들에게 검색을 받았고, 우리는 형식적인 검문을 받고 은행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은행 안에도 20여명의 경찰들이 예의주시의 눈빛으로 방문객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마치 시위대가 넘실대는 거리의 살풍경이었다. 그것도 기다란 총을 어깨에 멘 경찰들이 군데군데 배치되어 잇어 더욱 살벌했다. 그러면서도 아무일 없는 것처럼 은행업무를 보러온 방문객이나 경찰들은 평범한 모습이었다. 낯선 방문객에 대한 호기심어린 눈길은 은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은행을 빠져나와 무나와 우리 일행은 근처에 베스킨 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맛보았다. 그리고 타멜을 걸어 한국사회 전쟁 후의 거리를 연상시키는 상점과 길거리 풍경들을 보며 거리를 걸었다.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결코 동정심은 아니었으며 동정할 만큼 그들의 표정이나 태도가 나약해보이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하려는 의지를 갉아먹는 사회적 씨스템에 심각성이 보일 뿐이었다. 어쩌면 씨스템의 통제에 익숙하게 살아온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많았다. 그런 통제없는 사회, 보이지 않는 자발성만이 그들의 통제수단이며 그들을 움직이는 수단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고대로부터 내려온 그들만의 통제수단인 카스트의 병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런 것인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벅찬 현실에서 그들에게 절망처럼 달라붙은 희망의 끈이 있어 그들은 지치고 힘겨운 일상을 그나마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다. 생기있는 거리가 지저분함을 상쇄할만 했다.

타멜거리에 한국 식당 에베레스트 앞에서, 좌로부터 밀런의 조카 무나, 밀런, 필자. ©김형효
타멜 거리의 모든 것을 지금 나의 조국 한반도 특히 한국을 기준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낯설지만 풍족했던 네팔의 과거와 만날 수 있었다. 관광객이 네팔의 중심인 카투만두 타멜 거리를 거치는 것은 당연할 일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있거나 무언가 새로운 일을 모색할 만한 여력이 없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들이 제공하는 공산품들은 외국에서온 관광객들이 찾기에는 형편없는 것 일색이었다. 쓸만한 물건을 찾으려면 힘든 아이쇼핑을 한 후에나 가능할 듯했다.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어느 정도 특성화되어 보이는 거리를 정화시키고 재정비하는 일이 급선무로 보였다. 특히 환경문제는 외국인들에게는 심각하다. 물론 그것은 그들에게도 심각한 것이다.

타멜의 상점들에 고대 네팔의 찬란한 문화의 흔적들을 만나면서 네팔이 주는 신선한 충격을 맛보았다. 평소 네팔에 대하여 막연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는 정적인 고대, 선적인 고대, 흰두의 나라, 불교의 나라, 그러나 그런 우리의 수식 뒤에 엄연하게 도사리(?)고 있는 절대적 문화는 우리가 스스로 네팔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방관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런 풍경들은 네팔의 젊은이들의 요즘 모습, 아니 6년 전 부터 알고 지내오며 자주 만났던 네팔의 젊은 친구들에 의해 활성화되고 있는 경제, 사회, 문화의 일반적 발전은 서서히 꿈틀대지만 외면되고 있는 그런 형국을 보여주는 듯했다. 나는 그들의 문화를 보며 그들에게 절망의 끝이 머지않았으며 희망이 가까이에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 깊숙히 너무나도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종교의식은 그들에게 하나의 족쇄이며 그들에 평화를 유지하는 절대적 기준이 되고 있는 듯하다.

수많은 조각품과 진열대 위에 네팔의 전통칼, 쿠꾸루. © 김형효
네팔에 머물고 있으며 네팔의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에 회의와 절망에 묻혀 있는 현지인과 현지 외국사람들의 눈으로 보기 힘든 것이 아마도 그런 점일 것이다. 나는 평소처럼 말하고 싶다. 내부에서 내부를 바라보는 것은 크고 작은 휩쓸림을 다르게 느낄 수 있을 뿐, 정확하게 바로보기에는 너무나 큰 어려움이 있다. 외부에서 내부를 보는 만큼 활발하고 다양한 시각과 시선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리고 외부의 움직임을 자각한 사람들에 의해 내부는 개선되고, 내부의 개선은 내부를 외부세계로 연결짓는다. 그러니 이런 어려움과 현실에 나태와 방관의 사슬만 끊는다면 그들에게 희망이 있다.

무나는 지금 13학년이다. 네팔의 교육은 10+2체계이다. 그런데 무나는 13학년이니 상급학교에 진학한 것이다. 네팔은 10학년까지 한국에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2는 학사와 석사과정, 13학년인 무나는 앞으로 2~3년간 더 공부를 하면 박사과정을 마친다고 한다. 그런 무나의 뛰어난 영어실력에 곁들여진 친절 덕분에 어려운 영어로 손짓 몸짓을 해가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네팔거리를 활보했다. 네팔의 전통미가 잘 조화를 이룬 상점에 들어가 구경을 하며 나는 그들의 문화에 흠뻑 젖어들 수 있었다. 나는 무나에게 무언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물론 내가 사고 싶었던 다기세트를 사는 것을 뒤로 미뤘다. 잘 만들어진 다기세트의 가격이 네팔돈으로 150루피이니 한국돈으로 7,000원 정도란다. 나는 한국에 돌아갈 때 내가 원하는 것들을 구입하기로 하고 우선 한국에서 돌아온 삼촌 친구로서 무언가 선물을 해야 할 의무감을 느끼며 그에게 선물을 고를 것을 제안했다. 한사코 거절하던 그는 강권하듯 하는 내 마음을 받아들여 작은 가방을 골랐다. 350루피였는데 330루피에 구입할 수 있었다.

거리의 심각한 오염을 외면할만한 낯선 풍경과 낯선 문화와의 만남, 그리고 훌륭한 문화를 만난 기쁨은 지울 수 없는 기억이 되리라!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즐거웠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길에 밀런의 친구들을 가끔씩 만났다. 사업을 시작한 친구, 사업을 하다 쉬고 있는 친구, 그냥 평범하게 알고 지내는 친구, 그렇게 지나치다 만나며 헤어지기를 반복해가며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그의 사촌형님인 헤므라저는 큰 기둥처럼 그의 집 앞에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물론 그의 집 앞에서 그의 친척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경이로운 시선과 부러움에 가득한 눈빛을 의식하며 마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부유한 생활이나 넉넉한 살림살이를 살고 있지 못한 내가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받는다는 자체가 그들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타멜 거리의 먼지투성이인 몸을 씻기 바쁘게 준비된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여전히 밀런은 우리의 훌륭한 통역이다. 나는 무나와 럭스미 그리고 아이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서투른 나의 영어 솜씨는 창피스러웠지만,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데리데리 남부럿처!라는 인사말을 연발하는 것, 데리데리 남부러!를 연발하는 인사로 모든 것을 커버했고 그들도 낯선 이방인의 재치로 받아들이며 서로 하나되었다. 물론 아리랑을 부르며 그들에게 어디에서 온 이방인인지를 인식시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다보니 짧은 순간 많은 네팔어를 습득할 수 있었다.

인사말 안녕하세요(너마스떼)로 시작해서 앉으세요(버스누스). 맛있습니다(미토차). 아버지(부바), 할아버지(아조르바), 어머니(아마), 할머니(아조르마), 언니(디디), 어서오세요(아우누후스). 환영합니다(솨거떰). 감사합니다(꾸시라교). 주로 네팔어와 한국어를, 영어를 징검다리 삼아 배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밀런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알기 위해 서로가 필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식사를 마쳤고 네팔 전통주를 마시며 한 잔 술에 취기를 느끼며 인사를 더했다. 그리고 술기운에 견디기 힘든 나는, 밀런의 부바(아버지)가 알려준 얼리 수트니(이제 잠자리에 들겠습니다.)를 연발하고 그의 부바는 발음을 교정하느라 5분여를 수트니! 쑤트니!를 연발한 후, 오케이 싸인을 내는 아버지와 인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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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네팔-한국 민간인의 삶을 이어주는 여러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 {대자보}(2004.7.28)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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