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광장
[KOREAN] | [ ENGLISH ] | 로그인  l  회원가입
   전체기사    l    평화 TV    l   문명 전환   l   평화 통일   l   평화 도시   l   평화 마을   l   사업   l
  2019.11.18(월)  
 지난호 보기

상세검색
평화도시 만들기
평화마을 만들기
평화 기행
게시판 BOARD
문명전환 연구소 게시판
'평화 도시' 게시판
'평화 마을' 게시판
공지 사항
영상 자료실
일반 자료
섹션목록
연재목록
특집목록
토론방
PEACEMAKING
신문소개
후원하기
이메일구독신청
기사제보
구(舊) 평화만들기
182호   (2005/05/15)
평화 만들기 182호
182호 기사목록  
☞ 182호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기사 메일전송 기사 출력
북한 핵무기 보유 선언의 파장 (17)

인도-파키스탄-북한의 핵개발 비교 ①

김승국 기자 (기사입력: 2005/05/03 10:16)  

북한의 핵무기 보유 과정이 인도 · 파키스탄과 닮은 점이 많다. 세나라 모두 제3세계의 빈국(貧國)인데다, 민중의 빈곤 수준이 비슷한 처지에 있다. 빈자(貧者) · 빈국의 핵무기 보유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 세나라를 중심으로 ‘핵개발의 애증 삼국지(愛憎 三國志)’를 살펴보면 동일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인도 · 파키스탄은 중국을 에워싼 애증관계를, 남북한은 미국을 에워싼 애증관계를 갖고 있다. 인도는 反中(중국 반대), 파키스탄은 親中(중국과 친밀), 남한은 親米(미국과 친밀), 북한은 反米(미국 반대)의 엇갈리는 애증 관계 속에서 각각 핵문제로 고민해왔다. 파키스탄에서 볼 때 敵(인도)의 敵(중국)은 우리편이다. 북한에서 바라볼 때 적(남한)의 우방은 적(미국)이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계기로 미국이 소련의 방파제로서 파키스탄을 지원한 사실이 인도-파키스탄 핵무기 개발 경쟁에 악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소련의 방파제인 남한에 미군을 주둔시켜 한 · 미 연합전력을 강화한 것이 북한 핵무기 보유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양상으로 핵무기 개발의 외부요인이 제공되었다.

중국의 핵무기 압박(인도를 향해 핵무기 배치)에 저항한 인도가 핵실험하자 파키스탄이 인도에 대항하기 위해 핵실험을 했다. 중국의 핵보유→인도의 핵보유→파키스탄의 핵보유라는 핵도미노 현상이 한반도 주변에서도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즉, 미국의 대북 핵전쟁 · 북한 붕괴 시나리오→북한 핵보유 선언(핵실험)→남한 · 일본의 핵실험→중국의 핵군비 확장→대만의 핵실험→동아시아 전체의 핵무장이라는 핵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위의 두가지 핵도미노 현상은 모두 핵강대국(중국과 미국)의 핵정책 · 대외정책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핵도미노 현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핵강대국의 핵군축 · 핵위협 중단조치가 있어야 한다. 또 양자(인도 대륙 · 한반도) 는 식민지배를 받은 곳이라는 동일성(인도대륙은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고 남한은 현재에도 미국의 종속 아래에 있음)을 갖고 있다. 양자의 핵도미노 현상을 거칠게 보면 제국주의 식민통치의 후유증이므로, 후기 식민주의(post-colonialism)의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 따라 세나라(인도 · 파키스탄 · 북한)의 핵개발 역사, 핵개발 동기, 핵개발 배경, 핵개발 결과, 민족주의와 핵무장론의 결합 등을 상호비교하는 순서로 이 글을 기술한다.

Ⅰ. 핵개발의 역사

1. 인도

인도는 독립 당시 네루(Jawaharlal Nehru)에 의해서 수립된 외교정책을 꾸준히 추구하였다. 핵정책도 네루의 일반적인 외교노선, 즉 중립주의와 평화주의 노선을 따라 서방과 공산진영간의 대립의 산물인 핵무장 경쟁을 비판하고, 중도적이고 평화적인 입장에서 평화적 이용을 실현시키겠다는 정책을 표방하였다. 따라서 독립 이후 인도는 국제사회에서 세계 핵무기 경쟁에 반대하며 핵평화정책을 주도하는 국가의 하나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인도는 1974년 포크란(Pokhran)에서 핵실험을 실시함으로써 세계에서 여섯 번째 핵실험국이 되었다. 이 핵폭발 실험은 국제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 이유는 인도가 핵의 평화적 이용을 주장하는 데 앞장 서왔던 국가였다는 이유 이외에도, 핵기반 설비를 제공한 미국이나 캐나다가 군사적 목적이 아니라 평화적 목적으로 지원한 시설을 핵폭발 실험으로 전용한 첫 사례였기 때문이다. 핵실험 이후 인도는 이 실험이 어디까지나 평화적 핵실험이었으며, 이를 핵무기 개발에 이용할 의도는 전혀 없다고 거듭 주장하였지만, 이후 국제사회는 인도를 사실상의(de facto)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정하였다. 그것은 이미 인도가 핵무기 제조능력을 갖추고 있고, 핵옵션 정책을 통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핵무기 보유국가로 변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도는 1998년 5월 포크란에서 제2차 핵실험에 성공을 거둠으로써 명실공히 핵무장 국가가 되었다. 인도의 핵실험은 네루 시대의 평화적 핵정책을 완전히 포기하고, 적극적인 핵무장정책으로 전환함으로써 남아시아에서 핵무기 경쟁의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은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인도는 핵무장 국가로 나아가려 한다는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지속해 왔다. 인도가 핵확산 금지조약(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NPT)에 조인하기를 거부한 것, 인도가 핵무기 개발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되는 시설들에 대한 국제사찰을 거부한 것, 그리고 유엔 군축회의에서 추진해 온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omprehensive Test Ban Treaty: CTBT)에 협력을 거부한 것 등이다.(고경희 2003, 59~61쪽)

이러한 핵개발 과정을 세단계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제1기(1948~1968년); 핵의 경제적 이용에 국한

초기 인도의 핵정책은...경제발전을 위한 에너지원으로서 개발하는 데 역점이 두어졌다. 더구나 핵을 군사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징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고경희 2003, 63쪽)

인도에서 핵에너지는 대체자원으로 인식되었다. 핵의 대체자원화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첫째, 핵원자로의 연료로 쓸 수 있는 토륨(Thorum)의 매장량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인도는 토륨 매장량이 약 360,000톤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 토륨은 우라늄과 같이 핵연료의 주요 자원으로 알려져 있었다.
둘째, 핵기반 시설이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1950년대 중반에 인도는 상당한 핵기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셋째, 핵의 사용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호적인 분위기이다. 인도는 캐나다의 지원하에 1960년 40킬로와트 급 중수로인 키루스(CIRUS) 원자로를 건설하였다. 이 원자로의 중수는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았다. 1965년 1월에는 인도 최초의 재처리 시설이 트롬베이에서 운용되기 시작하였으며, 1974년 실험에 사용된 플루토늄이 이 시설에서 재처리되었다.(고경희 2003, 64~67쪽)

독립 후 1960년대 후반까지 인도의 주요 대외정책 목표 중의 하나는 핵무기 보유국들을 비난하고 핵군축을 적극 지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도의 초기 핵군축지지 외교는 두 가지 요소에 의해 영향 받았다. 첫째는, 이상주의적 성향을 가진 네루가 핵군축에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군축 제안을 통해 군사적 부담을 낮춤으로써 신생국 인도의 경제적 성장에 총력을 기울이려는 실용적인 정책에 따른 것이었고, 동시에 군축정책을 주도함으로써 인도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인도는 능동적으로 국제적인 핵무기 통제운동을 주도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인도의 존재를 깊이 인상지우려했다. 인도는 1963년 8월 8일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Partial Test Ban Treaty: PTBT)이 상정되었을 때 능동적인 지지를 보낸 국가들 중의 하나이다. PTBT는 NPT와 같이 핵의 수직적 확산보다는 수평적 확산에 제한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PTBT는 핵무기 비보유국들의 핵무기 확산을 금지하는 조약이었다.(고경희 2003, 67~68쪽)

2) 제2기(1968~1974년); 핵옵션 정책으로 전환

1968년 이후 인도 핵정책은 이율배반적이며 애매모호한 것이었다. 즉 한편으로는 핵폭발 능력을 과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핵무기 생산의 의사가 없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핵무장 능력은 보유하고 있지만 핵무기를 직접적으로 개발하지는 않는 정책을 핵옵션 정책이라 한다. 인도는 NPT 체제를 거부하고 1974년 핵실험을 수행함으로써 핵무기 제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에 과시하였으나, 당시 구체적인 핵무기 개발계획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고경희 2003, 71쪽)

인도는 NPT가 체결되면 기존 핵무기 보유국들에게 수직적 핵무기 확산의 특권을 누리도록 하면서 핵무기 비보유국들의 평화적 민간 핵활동을 통제할 수 있는 특수 지위를 부여하는 핵차별주의(Atomic Apartheid)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도의 NPT 거부 이유를 살펴보면 상당히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NPT를 거부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고, 실제로 핵옵션을 열어두겠다는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수상의 의도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인도는 주변국, 특히 중국과 국경분쟁 등으로 안보강화가 요구되던 시기였고, 중국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 핵무기 보유를 검토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고 있었다. 따라서 NPT에 가입하여 스스로를 구속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으려 했다. 이에 따라 인도는 핵연구를 가속화하였다. 국방장관 람(Jagjivan Ram)도 1972년 5월 2일 국회에서 평화적 목적을 위하여 지하 핵실험 기술에 대한 연구를 2년 동안 지속하였음을 시인했다. 인도는 드디어 1974년 5월 18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과 맞먹는 TNT 12~15 킬로톤 급의 플루토늄탄을 실험하였다. 인도가 핵실험에 사용한 플루토늄은 캐나다가 공급한 연구용 원자로 키루스에서 나온 사용후 연료를 인도 자신이 건설한 시설에서 재처리한 것이었다. 인도는 1963년에 독자적으로 연료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였다. 이를 우려한 캐나다의 투루도(Pirre Elliot Trudeau) 수상은 1971년 1월에 인도를 방문하여 인디라 간디 수상에게 인도가 NPT에 조인하여 사찰을 허용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인디라 간디는 그 제안을 거절했고, 1971년 의회에서 인도가 평화적 핵실험을 수행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실험은 수행되었고, 실험 몇 달 후 유엔 주재 인도 대사 자이빨(Rikhi Jaipal)은 핵실험이 가상 적들에게 억지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핵실험 후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들의 약 90%가 핵실험에 자부심을 느끼며, 그것으로 인도의 국제적 위신이 강화되었다고 생각한다는 반응을 나타냈다.(고경희 2003, 75~77쪽)

2. 파키스탄

파키스탄은 1956년에 핵에너지 위원회를 설치하고 1971년부터 원자로를 가동했다. 1976년에 플루토늄을 재처리할 수 있는 ‘뉴랩(New Lap)'이라는 실험용 재처리 시설을 건설했다. 1980년대에 중국의 지원 하에 급격하게 핵능력을 발전시켰다. 중국의 핵 지원은 농축기술부터 핵무기의 설계와 실험까지 전 부분에 걸쳐 이루어졌다.(권정수 1999, 59~60쪽)

파키스탄에게 있어 1974년 인도의 핵실험은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핵실험이 영토의 안보를 위협하는 핵 공갈이라고 비난하면서 대외적으로 안전보장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미국에 대해서는 對 파키스탄 금수조치의 해제를 요청하면서 이것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핵무장을 통해서 스스로 안전보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파키스탄의 핵 개발에 안전보장이 유인요인으로 작용했다. 1972년 부토(Bhutto) 수상은 고위 과학자들과의 만남에서 핵무기 개발 계획을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정수 1999, 60~61쪽)

1971년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파키스탄은 이 때부터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1971년 12월 부토 정권은 국내과학자들에게 ‘3년이내에 원자폭탄을 제조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당시의 파키스탄은 ‘머리 핀도 제조할 수 없는데 원자폭탄은 생각할 수 있나요?’라고 당시의 원자력 위원장(Isharat Usmani 박사)이 말할 정도이었다[북한의 경우 기초 생필품도 제대로 못 만들어내는 주제에 정교한 핵폭탄을 만들어내는 비정상 국가라는 비판을 감수해야할 듯]. 네델란드의 핵관련 시설에 72~75년에 고용되었던 칸(Abdul Qadeer Khan) 박사가 가스 원심분리장치 기술을 파키스탄에 누설했다. 부토 수상도 서아시아 · 이슬람 국가 · 중국을 방문하여 ‘이슬람의 핵’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그런 가운데 리비아가 적극적으로 응해 핵무기에 대한 접근(access)權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5억 달러를 제공했다. ‘풀을 먹어도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부토의 요구에 응해 하루라도 빨리 핵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우라늄 방식과 플루토늄 방식을 추구했다.(山田 浩 外 2001, 106쪽)

이윽고 파키스탄은 인도의 핵실험에 대한 대응으로 1998년 5월 28일과 30일에 잇달아 지하 핵실험을 처음 실시했다. 파키스탄의 첫 번째 실험은 파키스탄의 서부 지역 아프가니스탄의 경계 근처에 있는 샤가이(Chagai) 언덕에서 1998년 5월 28일 오후 3시 30분에 실시되었다.
------------
참고 문헌
* 고경희『인도의 외교정책과 국제관계』(고양, 인간사랑, 2003)
* 권정수 「탈냉전기 핵 확산과 통제에 관한 연구」(국방대학원 석사논문, 1999)
* 山田 浩 外『なぜ核はなくならないのか』(京都, 法律文化社, 2001)
----------
*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








김승국 기자기자의 다른기사보기


  관련기사
북한 핵무기 보유 선언의 파장 (18) 김승국 기자 [05.16]
북한 핵무기 보유 선언의 파장 (16) 김승국 기자 [05.01]

 독자의견 (총 1건)

전체보기 >>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추천
米國 이라고 표시하신 거 정말 잘했습니다 독자... 2005.05.17 705 0


powered by NEWSBUILDER® 

| 뉴스 | 문명 전환 | 평화 마을 | 사업 | 평화 도시 | 자료 | 칼럼 | 평화 운동 | 교육-평화대안학교 | 평화 이론 | 평화 광장 | 평화 통일 |
문명전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