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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명렬의 군 개혁 (12)

사관학교 개혁 ⑥ ---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육사출신들

표명렬 기자 (기사입력: 2005/05/14 16:24)  

5.16 쿠데타와 육사

“나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 되씹을수록 나를 눈물나게 감동케 해주던 사관생도의 신조를 되뇌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는 떨리고 숙연해졌다. 그러나 정의가 무엇이며 가까운 우리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본받아야할 정의로운 사람들은 누구인지 불의한 자들은 또한 누구인지 등에 대해서 아무도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기껏해야 “4년제 사관학교 출신들은 금전적 물질적 부조리와는 타협하지 않는 원칙 장교다” 정도였지만 그것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권력의 단맛을 알고 난 후부터는 변질되어 일반 장교들보다 한술 더 뜬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4학년 재학 중에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초기에는 미국 측의 부동의로 성공 여부가 불확실하여 모의자들은 몹시 불안했다. 다급해진 주동 세력들은 생도들의 지지를 통해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소위 혁명군을 육사에 급파했다. 생도 대장을 역임하면서 박학다식 강직 청렴하기로 많은 일화를 남겼던 박창암 대령(준장 예편, 작고)이 가슴에 수류탄을 주렁주렁 달고 눈을 번득이며 나타나 카랑카랑한 특유의 목소리로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그만큼 당시 4년제 육사에 대한 미국 측의 관심과 국민적 기대와 신뢰는 대단했었다.

그때 나는 제1대대장 생도 직을 맡고 있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언젠가는 우리가 주동이 되어 진정한 자기희생의 혁명을 이루리라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놓고 가슴을 펴며 살아왔는데, 그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도 모르겠고 귀하게 아껴놓은 기회를 도둑 맞은 것 같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지지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었다. 우리는 지휘체제가 와해되어버린 혁명 상황이니까 북극성 동창회(육사 동창회)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끈질긴 회유와 협박에 밀려 현역 훈육관들은 점차 지지 쪽으로 돌아섰다. 훈육관들이 소리를 지르며 집합을 명령했지만 우리 간부 생도들은 이에 응하지 않고 피해 버렸다.

엎치락뒤치락 실랑이 끝에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 생도들은 단독 군장으로 식당 앞에 집합했다. 생도대장 김익권 장군의 일장 연설이 끝난 다음 우리 생도들은 가지고 있던 M-1소총을 회수 당하였다. 군인에게 있어 죽음이나 다름없이 가장 큰 불명예인 무장해제 상태가 된 것이다. 그 날 저녁 중대장 생도 이상 우리 자치 간부 생도들은 명령 불복종의 이유로 불쾌한 냄새가 가득한 임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나는 제1중대장 생도 최창윤(총무처 장관 역임, 작고) 생도와 퇴교 이후의 앞날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밤을 세웠다. 그사이 박정희 쪽에 붙은 11기 몇 명이 주동하여 지지 쪽으로 선회 아침 일찍 특별 석방되었다며 내보내 주었다.

기분은 매우 언짢았지만 우리는 5.16을 지지한다는 시가 행진을 했고 시청 앞에서 지지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렇게 해서 육군사관학교는 사실상 협박에 굴복하여 하는 수없이 우리나라 민주 발전과 국군 발전사에 가장 치욕적인 기록으로 남을 5.16을 성공하게 만드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강한 자 앞에는 무조건 손들고 항복함이 일신의 안일을 위해 상책이라는 기회주의적인 사고를 일찍부터 체득한 셈이다.

육사 생도들만 이런 것은 아니었다. 12.12 군사반란 때, 천하를 주름 잡으며 떵떵거리던 기라성들도 베레모를 쓴 공수단 하사관들이 들이닥쳐 총을 겨누면 거의가 목숨을 애원하듯 두 손을 버쩍 들고 항복했다. 한 사람도 대항하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 군을 주도해온 세력들은 거의가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정의의 편보다는 강자(强者) 쪽에 줄 선 사람들이다.

대부분 고위직 간부들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독재자와 상관의 마음에 들게 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정의’ ‘민족’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다. 옳은 길을 주장하는 사람들만 억울하게 당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배우고 있었다.

군대 내의 ‘하나회’라는 사조직으로 인하여 육사 출신 중 비(非)하나회 장교들이 보직 및 진급 등 경쟁에서 부당하게 불이익을 당하고 있음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쑥덕거리기는 했어도 어느 누구도 당당하게 그 부당성과 문제점에 대해서 항의한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찍혀서 피해를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잘 보이려고 아첨하는 분위기였다. 사관생도의 신조니 명예 제도니 군인 정신이니 이런 것들은 손익계산 앞에서 헌신짝처럼 던져져 있었다.

12. 12 반란과 김오랑 소령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우리나라 민주 발전에 가장 부끄러운 세가지 역사적 사실을 성공하게 만드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앞에서와 같이 5. 16 군사 쿠데타를 성공하게 만들었고, 12. 12 군사반란 그리고 광주 학살을 주도했다. 지금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이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정리하여 훈육하고 있을까?

군대가 주동했던 역사적 사실을 군 자체에서조차 정당한 평가를 하지 않고 어물어물 적당히 하고 있다면 말이 안 된다. 실수와 잘못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을 통하여 어떤 깨달음과 교훈을 얻고 있느냐이다. 이런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서도 옳고 그름이 설명되지 않는다면 어디서 무슨 방법으로 도덕적 용기와 정의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자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12. 12 반란 과정의 상황을 살펴보면 육사 출신들 앞에는 국가도 민족도 군대도 없었다. 오직 육사 출신 저들끼리의 집단이기적 선후배만 있었다. “나 아무개야! 출동하지마!” 이런 몇 마디의 말로, 정상적인 군대 내의 지휘 계통과 명령 체계는 일시에 와르르 허물어졌다. 힘있는 자리에 있는 선배가 시키는 대로 “예! 선배님 알겠습니다”라며 움직였다. 도청(盜聽)과 감청(監聽)으로 군내 정보를 완전 장악한 당시 보안사는 육사 출신이라는 관계를 이용한 전화 통화만으로도 진압군을 무력화시키고 반란을 성공시켰다.

특전 사령부 예하의 특전 여단이 비 육사출신의 직속 상관인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려고 공격해왔을 때, 부관이었던 김오랑 소령만은 항복하지 않고 사령관을 끝까지 사수하다가 몸뚱이는 벌집처럼 총알받이가 되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의 시체는 걸레 조각처럼 되어 여러 날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육사인의 가슴속에 김오랑 소령은 아직도 버려진 상태 그대로다.

12. 12는 이미 반란이었다는 심판을 받았고 주동했던 사람들도 법률적 죄 값을 받아 정리되었다. 그러나 사관학교의 전통과 정신사적으로 이를 어떻게 해석하여 후배들에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전혀 정리가 되지 않는 상태다. 12.12이후의 역사를 다시 써야한다.

이런 지극히 간단하고 분명한 사실 하나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기득권자들의 눈치나 보며 어물쩍 하면서 생도들에게 어떻게 국가와 민족 그리고 정의(正義)와 역사 의식을 말할 수 있으며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심어 줄 수 있겠는가?

광주 학살

우리 민족은 굴곡 많은 현대사를 살아오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변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왔다. 사람들이 원통하게 죽고 찢기며 짓밟혀도 호소할 곳 없이 당하기만 해온 서럽고 한 많은 민족이라 아니할 수 없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와 전남 지역이 시민군의 장악 하에 놓여있던 때 군의 계획에 따라 서울 지역에 근무하고 있었던 전남 광주 출신 간부들이 광주의 상무대에 급파되었다. 데모에 불참할 것을 종용하는 선무 활동을 위해서였다. 현지의 실재 상황과 형편을 들어보니 ‘초동 강력 진압’이라는 미명 하에 비무장 시민에 대해서 너무나 무자비하고 처참한 살육을 감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군인의 본분이 무엇인가? 같은 민족이 아닌 경우에도 인간을 향해 그토록 잔인 무도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시 광주시의 상황은 무정부 상태라 하기보다는 독재에 항거한 민중이 승리해서 수립한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자치정부의 질서가 구현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를 실천한 위대한 경험이었다. 동학군 선배님들이 풀지 못한 민주 대동천하의 한을 며칠 동안 풀어드린 거나 다름없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들어보니 진압군의 잔악한 행위에 대해서 치를 떨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민족 의식이 결여된 잘못된 육군사관학교의 훈육 그리고 식민사관에 찌든 자들에 의해서 민족혼을 빼어버린 넋빠진 우리 군대의 모습이었다. 점령군으로서의 일본군을 도와 민족을 압살해왔던 친일 세력들이 이끌어 온 군대의 진면목이었다. 민족 의식에 대해서 아무 교육도 받지 않았던 사관학교 출신들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접근이 불가능하니, 전화를 걸어서 일가 친척 학교 선 ․ 후배들에게 ‘폭도’들 편에 가담하지 말 것을 설득하라고 했지만 나는 마음에 없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광주지역에 근무하고 있었던 육사 출신 장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똑같은 사실을 두고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하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광주 지역 주민들의 기질을 들먹이며 불순세력에 놀아났다는 등 한번 된통 혼이 나야 싸다는 듯이 말했다. 마치 영화 「킨타쿤테」에서 노예로 팔기 위해 아프리카 사람들을 마구 사냥하는 백인들처럼, 아무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투였다.

이것은 바로 사관학교 훈육이 너무나 잘못되었음을 웅변으로 입증시켜 주는 사실이었다. 보통의 양심과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그것은 그곳 주민들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고 조국의 민주화에 관련된 문제였다. 4년 간 훈육을 제대로 받은 간부들이라면 이 정도의 사안에 대한 기본 인식이 이렇게 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은커녕 보통 사람 누구라도 당연히 가지고 살아가는 극히 보편적인 정의감마저도 배양되지 않은 것이다. 강자의 눈치나 살피며 개인의 입신 출세와 영달을 꾀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기회주의자들을 양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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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전 육군 정훈감으로(준장 예편) 현재 군사평론가로 활약하고 있다. 필자는 또 {천주교 인권위원회}의 위원/ {민족문제 연구소}의 지도위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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