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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평화에 대한 일본의 입장과 전략

진창수 (기사입력: 2005/05/14 18:38)  

Ⅰ. 문제제기

지난 3월 22일 노무현 대통령이 육군 3사관학교 연설을 통해 ‘평화의 동북아 균형자론’을 밝힌바 있다. 여기에는 장차 중국과 일본이 동북아 패권을 두고 경쟁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 속에서 한국이 피해자가 되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이 균형자 역할을 함으로써 분쟁을 막고 동북아에서 협력의 질서를 만드는 주창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동북아 균형자론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는 일반 국민의 70%이상이 지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많은 비판이 제기되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균형자론에서 말하는 동아시아 정세 변화를 정확히 읽고, 우리의 나아갈 국가전략을 수립하자는 데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이 경쟁하고 갈등하는 현실 국제정치 속에서 한국이 과연 균형자(Balancer)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많은 전문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즉 미국의 국방비가 4000억 달러 이상, 일본 444억 달러(2000년 기준), 중국 412억 달러(2000년 기준), 한국 148억 달러(2003년 기준)를 고려할 때 미국의 국방비는 나머지 순위 8개국 국방비를 모두 합친 것 보다 크다. 현재의 미일 동맹 하에서 본다면 한국이 어느 편에 서서 균형자를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정부의 고위관계자들은 하드 파워(hard power)로서 한국의 역할과 함께 소프트 파워(soft power)로서의 역할도 강조하고 있지만, 여전히 안보분야에서의 한국의 무기력함은 남아 있다.

또한 현재의 중일간이 패권적인 갈등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유보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도 존재한다. 현재의 중일관계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어느 때보다 상호의존이 진행되고 있으며, 중국은 미중관계를 중시하고 있어 아직 중일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한다고 보기에는 이르다는 판단이다. 따라서 이들은 오히려 한국의 균형자론의 주창이 중일 양국의 패권경쟁을 부추기지는 않을까하는 우려조차 보이고 있다.

일본의 반응도 한국의 전문가들과 다르지 않다. 오코노기 교수와 다케사다 교수는 공히 한국이 균형자의 역할을 하기 보다는 조정자의 역할에 머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미국이 움직이지 않으면 단독으로 군사적인 행동을 하기 어려운 한계를 지적하면서 중국과 일본의 갈등을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동아시아 정책이 과연 중일갈등을 가져올 것인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저자는 일본이 취하는 동아시아 안보 정책의 적극적인 모습은 미국과의 협조관계를 강화시키려는 일본의 전략으로 이해하며, 이 점에서 일본의 역할 확대가 곧바로 중일관계의 긴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Ⅱ. 일본 정치의 변화

1. 고이즈미 수상의 터부시 정책의 타파

고이즈미 수상의 시대는 일본의 역할을 확대하려는 내셔널리즘적 발상이 국민적인 정서와 결합되면서 일본 정치의 중요부분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고이즈미 수상은 경제 구조 개혁을 중심으로 한 구조개혁 보다는 군사 안보를 중심으로 한 측면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나타내면서 그 지지가 유지되고 있다. 이는 일본 정치의 흐름에서 볼 때 탈냉전이후 일본 경제에 걸 맞는 군사력을 갖기를 원하면서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주장하는 세력이 정치권에서 점점 확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고이즈미 수상의 이데올로기 지형은 기시(岸信介)․후쿠다(福田赳夫)로 이어지는 자민당 매파 그룹에 속하고 있다. 따라서 고이즈미 수상은 요시다 시게루를 중심으로 한 보수 본류 노선이 취하는 ‘안보는 미일동맹 견지, 국내적으로는 경제 우선 정책’과는 약간의 차별 노선을 보인다. 안보정책에서는 미일안보 중심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집단적 자위권 행사 가능성, 조기 헌법 개정 추구, 총리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의 내셔널리즘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고이즈미 정권은 발족 당초부터 국제관계에서는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2001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 왜곡은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극심한 비판을 받고 있다. 결국 고이즈미 수상은 야스쿠니 참배를 8월 13일로 옮김으로써 그를 지지했던 국내 여론과 해외로부터의 비판에 대해 타협을 꾀했지만 아시아 여러 국가와의 관계는 부자연스러워졌다.

이러한 상황을 바꾼 것이 9.11 테러였다. 고이즈미 수상은 비교적 빠른 대응책을 표명하고 미국을 방문하여 부시 대통령과 미국 여론의 편을 들어주었다. 미국이 주도한 아프간 전쟁에서는 종래의 법 해석을 뛰어넘어 특별입법을 단행하고 인도양에 해상자위대를 파견하여 연료보급 등의 후방지원을 실시하였다. 국회에서는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하는 헌법해석의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고이즈미 수상은 법해석에 대해서는 애매하게 대답하고, 미일동맹과 UN안보리결의를 근거로 협력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여론의 지지를 모아 이를 극복하였다. 이 후에도 고이즈미 수상은 테러와의 전쟁에 몰두하는 부시정권을 강하게 지지하면서, 부시 대통령과의 개인적 신뢰관계는 고이즈미 수상의 하나의 권력기반이 되었다. 2002년부터 2003년에 걸쳐서 이라크에 대한 무력행사를 둘러싸고 국제사회가 분열했을 때, 고이즈미 정권은 일관되게 부시정권을 지지하였으며 일본 여론의 다수는 고이즈미 정권을 계속해서 지지하였다.

고이즈미 수상은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착실히 실행하기보다는 외부적인 위기와 지금까지의 터부를 타파하는 것으로 국민적인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고이즈미 수상은 9.11을 계기로 기존의 정책에서 터부시(예를 들면 안보정책)되어왔던 것에 과감한 결단과 정책적인 시행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고이즈미 수상은 2001년 11월 PKO 본체사업에 대한 동결을 해제하고, 2002년 동티모르에 과거 최대 규모의 부대 등을 파견했다. 또한 2002년 2월의 시정방침연설에서 유사법제의 입법화를 내걸고, 4월에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은 정부의 통제가 강화된다는 것에 대한 일본 국민의 비판으로 일단 폐안이 되었지만, 2003년 약간의 수정 후 다시 제출되어 자민, 민주 양당이 중핵을 이룬 수정협의가 진행되었다. 2003년 6월 무력공격사태대처법을 중심으로 하는 유사법제가 국회의원 90%의 찬성을 얻어 성립되었다.

2002년 8월말 갑작스런 평양방문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회담 의향 발표는 고이즈미 수상의 지지를 상승시키기 위한 전략적인 측면이 컸다. 그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북한에 대한 반발이 전에 없이 강했다. 직접적으로는 북한이 일본인을 납치했다는 의혹이 널리 보도되었기 때문이지만, 반북 감정은 최근까지 북한에 안일한 자세를 취했던 55년 체제하의 여야당과 관료에 대한 불만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이러한 국내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9월 17일 고이즈미 수상은 북한을 방문하여 북일평양선언을 발표하였다. 북일평양선언에는 납치자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의 사과를 받아내고, 일본은 북한에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의 형태로 자금을 제공한다는 것과 북일 간의 국교정상회담을 시작한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 되었다.제1차 방북으로 인하여 고이즈미 수상의 지지율은 상승하였다. 이는 고이즈미 수상이 정치적인 생명을 걸고 방북이라는 대담한 결단을 내림으로써 납치자 문제에 대한 고이즈미 수상의 역할을 일반 국민들이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13명의 납치를 인정하고, 그 중 8명이 사망했음이 알려지면서 일본 여론은 북한에 대해 비판적이 되었다. 게다가 그 후에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발표하고, 북한이 핵개발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북한과의 국교 교섭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처럼 북일 관계는 고이즈미 수상이 생각한 만큼 진전되지 않았으나, 고이즈미 수상의 터부를 타파하는 외교적인 노력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결과 고이즈미 수상은 2003년 9월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하여, 과반수인 399표를 획득함으로써 압승을 거두었다. 고이즈미 수상은 같은 파벌인 후쿠다 야스오를 관방장관에 임명하고, 젊은 아베 신조를 자민당 간사장으로 발탁하는데 성공하여 각료인사에서도 주도권을 발휘하였다. 반대로 하시모토파 (구 다케시타파)의 중진이었던 노나카(野中広務)는 반고이즈미 세력의 규합을 꾀했지만 실패하여 정계 은퇴를 표명하였다.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하시모토파의 후보 후지이(藤井孝男)는 65표만을 모으는데 그쳤다. 2003년 11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는 자민당 의석이 약간 줄긴 했지만 연립정권은 다수를 유지하였고, 한편 민주당도 큰 폭으로 신장했지만, 보수신당, 사민당, 공산당은 위기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그 사이 일본의 방위와 안전보장정책도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유효한 대외정책의 수단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방위력은 이라크 전쟁을 기점으로 해외에 군사를 파견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또한 미일안보체제하에서 지역적 협력도 제도화되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터부시되어왔던 유사법제도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성립되었다. 안전보장, 위기관리, 전략, 위협 등, 55년 체제 하에서는 일부의 전문가에만 한정되었던 개념이 일본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일본 국내의 헌법 해석을 중심으로 했던 55년 체제 하의 ‘신학논쟁’을 넘어서 보다 구체적인 수준에서 개헌을 논의하게 되었다.

연표 1. 고이즈미 수상 관련 연표(생략)

2. 전후 정치가의 등장

고이즈미 수상의 우익적인 성향과 더불어 주목할 만한 일본 정치의 변화는 일본 전후세대의 정치가가 정치권의 전면에 부상하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외교정책에서 합리주의적인 원칙과 자국이익중심의 원칙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은 북한에 대한 태도에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97년 방조단 이래 자민당은 북한 측에 행방불명자의 조사를 의뢰하면서 한편에서는 식량을 원조하는 온건정책을 유지하였다. 이에 비해 요네다로 대표하는 젊은 세대들은 “북한에 쌀을 보내어도 납치사건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강경자제로 나간다고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로 반문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대중관계에서도 일중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기존의 노선과는 달리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인 입장에서 대만과의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고 있다.

국내적으로 보면 전후세대 정치가들은 내외 정세의 변화를 반영하여 유사입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측면이 강하며, 헌법개정까지 용인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이전의 나카소네와 같은 전통적인 우파와 같은 경향을 지니고 있지만은 않다. 자위대의 확장이 가지는 부정적인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으며, 국제관계에서 협력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간과하지는 않는다. 다만 역사문제에 있어서는 내정간섭이라고 불쾌하게 생각하며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 한다.

따라서 전후 세대 정치가는 일본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고 일본의 국제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다. 일본의 ‘전전 세대’들 중에서 극우 인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한일관계의 특수한 측면을 이해하여 갈등을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현재의 전후 세대들은 일본이 언제까지 과거사 사과와 배상요구에 끌려 다녀야 하느냐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고 있어 내셔널리즘적 정서에 부응하는 강경입장을 취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 대리이다. 납치문제 이후 대북 강경 발언으로 인기가 올라간 그는 '자위대도 군대이다’ ‘누가 총리가 되어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야 한다’는 등 자극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전후 세대의 정치가들이 정치권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일본 국민들의 변화와도 무관하지는 않다. 1990년대에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일본 국민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불안감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는 이전과 달리 자신감의 상실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일본 사회 내에서는 일본경제의 침체에 대한 패배감의 반작용으로 강한 일본을 재건해야 한다는 내셔널리즘적인 열망이 강하게 대두되었고, 정치에 대한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 국민의 열망과 희망은 일본의 정체성 확립을 주장하는 우익 세력과 전후 정치가들의 현실주의적인 외교정책에 동조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일본 국민들의 변화는 이전과 달리 국제사회의 일본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방어하려는 태도에서도 알 수 있다. 한 예로 동아시아로부터 지속적으로 비판받는 것에 대한 일반국민들의 회의와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즉 이전 일본 국민들의 수동적이고 침묵적인 자세가 '일본은 도대체 몇 번이나 사과해야 하나'라는 적극적인 방어 자세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동안 일본사회에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이며, 식민지 지배자로서 일본을 반성해야 한다는 인식이 정착되었다. 또한 이에 대해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나름대로 한국이나 중국에 반성과 사죄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점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대수상이 한국, 중국에 사죄를 거듭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중국에서 일본의 반성과 사죄가 부족하다는 비난이 계속되자 일본국민들 사이에서는 한국과 중국에게 ‘적당히 해라’하는 식의 반감이 확대되고 있다.

Ⅲ. 일본의 동아시아 정책

일본 정치의 변화는 이전과 달리 동아시아 국가들과 갈등을 가져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적극적인 안보 정책을 취할 수 있는 국내적인 조건을 형성시키는 이중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 일본의 동아시아 정책은 항상 ‘미국과의 협조’ 라는 틀 속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아시아지역에서 일본의 존재감은 미비하였다. 냉전 후에도 일본의 전략은 동아시아에서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위협을 억제하고, 대응하기 위해 미일동맹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미일동맹을 바라보는 일본의 시각은 형식적으로 미일간의 이국간 동맹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동맹이라고 보았다.

일본 국내정치의 변화와 더불어 일본의 대아시아 정책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게 된 것은 국제적인 사건이었다. 무엇보다도 2001년 9.11로 인한 미국의 대외안보정책의 변화이다. 9.11이후 미국은 대 테러전을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국가안보목표로 설정하였다. 이에 미국의 동맹 개념도 특정 국가에 대한 억지력의 확보로부터 불특정 테러집단 및 불량 국가에 대한 공동작전의 개념으로 변화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안보정책도 변화하게 되었다. 둘째 북한의 1998년 8월 대포동 미사일 발사는 일본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냉전 후 소련이 해체되어 일본에 대한 소련의 군사위협이 없어진 현재 일본에게 가장 큰 안보상 위협은 북한으로부터 오고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와 함께 북한의 핵 문제는 일본 국민들의 안보 관념을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셋째 중국의 대두는 일본이 아시아에 대한 정책을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최근 중국은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국방예산을 증가시키면서 군사력을 현대화하고 있다. 민족주의적인 경향과 함께 중국의 부국강병정책은 일본의 입장에서 위협적이 아닐 수 없다.

그 결과 최근 일본의 안전보장정책은 이전과 달리 적극적성을 띠고 있다. 일본의 안전보장정책을 (1) 전수방위: 자국의 방위 (2)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 안전에 공헌, (3) 글로벌한 안전보장에 공헌 이라는 3가지로 나누어 볼 때, 기존의 일본의 안전보장정책은 전수방위가 중심적인 역할이었다. 그 예로 1990년 걸프전 당시 1992년 국제평화협력법이 성립되어 자위대를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에 참가시키게 되었지만, 이를 위해서는 국내에서 많은 논쟁과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안전보장정책은 이전과 달리 전수방위에서 점차 탈피하여 동아시아 지역과 글로벌한 안전보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동아시아 지역에 대해 일본의 안전보장정책의 확대는 1997년 9월에 성립된 미일 신가이드라인과 이에 준해 1999년 5월 28일 성립된 주변 사태법(위의 (2)에 해당)에서도 나타난다. 미일 신가이드라인에서는 일본의 평화와 안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일본은 전수방위를 위한 자위대의 군사행동이 허용하는 지역이 반드시 일본의 영역 내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즉 미일 신가이드라인은 미일동맹의 지역동맹화를 자위대와 미군의 협력관계로 구체화한 것이다. 그러나 주변 사태를 정의함에 있어 ‘일본의 평화와 안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사태’라고 규정하면서 이는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태의 성질에 착목한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일본이 재무장한다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신가이드라인은 평화헌법의 테두리 내에서 전수방위원칙과 비핵 3원칙을 준수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주변 사태법은 주변사태의 발생시 일본이 1) 후방지역지원, 2) 후방지역 수색구조 활동, 3) 선박검사활동에 관한 법률에 규정하는 선박검사활동 등 필요한 조치를 실시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후방지역이란 ‘일본의 영역 및 전투행위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또는 전투행위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인정된 일본 주변의 공해 및 그 상공’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통해 후방지역에서 일본은 자위대를 통하여 미국 군대에 대한 물품 및 역무의 제공, 편의의 공여 등의 지원조치를 실시할 수 있다. 이 같은 미일 신가이드라인과 주변 사태법은 그 적용범위를 일본영역을 벗어나 미군이 활동을 전개하는 후방지역, 일본 공해 및 그 영공까지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행사를 대응 조치의 범위에서 제외시킨 것은 한편으로는 그 범위의 한계를 가져오게 했다고 할 수 있다.

2001년 10월 26일 제정된 대테러 촉진법과 2003년 10월 10일 성립된 이라크 지원법은 (3)의 글로벌한 안전보장에 공헌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1990년대 초의 자위대 해외 파병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그 차이점을 살펴보면 우선 자위대를 파견하는 지역적 한계를 확대하였다. 대테러 작전에 대한 후방지원을 지리적 개념이 아닌 상황적 개념으로 확대하면서 대테러전으로 인식되는 곳이라면 세계 어느 지역으로도 자위대를 파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9.11 테러 이후 일본은 유엔의 결의나 승인 없이도 자위대를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에 편입시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았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자위대가 미군의 후방지원을 한다는 원칙은 고수하고 있으나, 사실상 전투지역에도 자위대를 파병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는 점이다.

일본은 2003년 6월 6일 유사관련 3법을 통과시켜 일본 방위정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유사법제는 일본이 외부로부터 공격을 당했을 경우에 대응을 규정한 방어적인 측면도 있지만, 무력공격 예측사태라는 범주를 두어 일본을 공격할 징후를 보일 때 예비적인 공격의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이점에서 일본이 전시동원적인 성격을 띠는 유사법제를 정비한 것은 일본의 안보정책에서 획기적인 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처럼 일본 안보정책이 적극화되면 당연히 미중관계는 긴장관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일중간은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 참배 문제로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아직 군사적인 측면에서 갈등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일본 안보정책이 적극화되었어도 중일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선 자위대의 파견이 미일동맹의 틀 내에서의 후방지원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대테러촉진법, 이라크 지원법은 미국과의 연대를 유지하는 것이 커다란 목적이었다. 아직 일본 영역이외에서 일본이 단독으로 자위대를 파견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해외에 파견된 자위대의 활동을 보면 후방지원, 재건지원 등에 한정되어 전투행동에 참가하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방위비 예산을 보더라도 방위예산이 증가하는 경향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은 안전보장정책을 적극적으로 확대하면서 군사기술의 첨단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방위비의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또한 현재의 일본 안보정책이 중국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지 않고 있는 것도 중국과의 갈등을 악화시키지 않는 중요한 요인이다. 따라서 대테러 촉진법이나 이라크 지원법은 물론이고, 주변 사태법도 미중관계가 안정되어 있으면 중국에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경제 부문에서 일본의 동아시아에서 역할 확대는 안보부문과는 달리 미일이 항상 같은 보조를 취하는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이후 일본 제조업의 동아시아 직접투자가 확대되면서 일본의 대아시아 경제협력은 실질화 되기 시작하였다. 즉 아시아를 무역, 직접투자를 중심으로 한 사실상 일본과의 경제 협력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85년 플라자 합의 당시 일본의 해외 투자의 대부분은 미국이었지만, 이후 점차 아시아로 그 중심이 옮겨지기 시작하였다. 일본 기업의 해외진출은 한국, 대만, 싱가폴, 홍콩에서 시작하여 동남아시아나 중국으로 이전하기 시작하였다. 1991년에 일본의 대아시아 수출은 일본의 미국 수출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부터 일본은 APEC을 통하여 아시아에서 자유화와 개방화를 추진하려는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여 일본과 미국과의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는 일본에서 미일협조만으로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도 일본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의 경제 지배를 우려하고 있었으나, 1990년대 일본의 장기침체는 이를 불식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와 함께 아시아 국가들은 아시아 경제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즉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의 역할이 확대하는 것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저항감이 일본에 대한 기대로 변화하면서 일본이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1997년 일본은 아시아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아시아통화기금(AMF)구상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의 AMF 구상은 미국의 반대에 부딪치고 게다가 중국도 그 구상에 대해 지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명하면서 결국 실패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과 동아시아에 있어 시장을 확보하기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예를 들어 ASEAN을 둘러싼 FTA 경쟁은 그 전형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현재 진행 중인 중일간의 대ASEAN FTA 경쟁은 순수하게 경제적인 이유 뿐만 아니라 안전보장과 정치적인 이유에서도 비롯되고 있다. 즉 2002년 1월 일본이 싱가포르 등과의 자유무역협정 (FTA)을 체결하고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과의 FTA 교섭을 적극화하려고 하자 중국은 ASEAN과 10년 내 FTA체결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응해서 일본은 ASEAN에 대해 FTA를 제안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ASEAN을 둘러싼 중일간의 경제적인 패권다툼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일간의 경쟁을 통해 결과적으로 ASEAN과 중국, 일본, 그리고 미국의 상호적 시장개방이 가능해지고, 이 과정에서 ASEAN이 어떤 국가에 치우치지 않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해 질 수 있다. 게다가 중일간의 경쟁이 WTO의 규칙에 의해 행해진다면 결과적으로는 상호의존을 심화시켜 지역전체에 플러스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FTA의 만연은 WTO가 갖고 있는 세계전체의 무차별 원리의 적용과 달리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서로 이질적인 상태의 무역체제를 출현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FTA를 추진하는 것과 관련해 WTO와의 정합성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중일간의 경쟁을 완화시키는 길이 될 것이다.

Ⅳ. 일본의 북핵 대응

앞에서 살펴본 바와 일본의 동아시아 안보정책은 미국과 협조노선을 틀을 벗어나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북핵문제에서도 미국과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하고 있다.

최근 북한이 핵무기 제조 및 6자 회담 참가 중단을 전격 선언한 뒤 일본의 정치권 일각에서는 경제제재 등 강경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으나 6자회담의 복귀를 촉구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다시 ‘대화 우선’의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핵무기 보유 가능성에 대해서 마치무라 외무장관은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만 확정적으로 판단하는 국가는 없으며 일본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하면서, 확정적인 판단을 유보하였다. 고이즈미 수상도 ‘북한은 말하는 것과 진의가 다른 경우가 있다. 말하는 것이 정말로 진의인지 아닌지를 잘 판단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당장의 제재에는 반대하였다. 또한 ‘지금은 어려운 시기이지만 평화적인 해결 밖에 없다. 교섭의 창구를 남겨 놓으면서 북한이 하루속히 6자 회담협의에 참가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또한 여당(자민당)의 다케베 간사장도 고이즈미 수상같이 ‘일본 정부는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6자 회담이 재개되도록 끈질기게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터무니없는 협박조 발언은 북한의 상투수단이기 때문에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신중히 고려해 6자회담에서 납치문제와 핵문제, 미사일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일본 정치권의 반응과는 달리 일본 국민들의 대다수는 북한 핵문제 및 납치자 문제 해결을 위해 대북경제제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요미우리신문의 2월 12~13 양일간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일본 국민의 67%는 6자 회담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고 보면서 납치자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대북 경제제재가 필요하다는 응답이 71%에 달하였다. 이처럼 일본국민들의 여론과 일본 정치권의 반응은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본 정치권의 대응이 한국이 의도하고 있는 북핵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이라는 맥락에서 설득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명백하다. 일본 정치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북핵문제의 해결이 국민 여론의 동향을 거슬려 대화를 주장할 만큼 정치적인 이익(예를 들면 재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북핵문제에 있어서는 국민들의 여론을 고려하여 그 점을 대변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정치적인 이익이 될 것이다. 이점에서 현재 일본 정치권의 반응은 국민들과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정치가들도 국민과 마찬가지로 북핵문제에 대해 압박 정책을 선호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치가들이 지금 당장 북한에 경제제재를 주장하지 않는 이유는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에 돌입할 만큼 성숙된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선 미국이 관망의 자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일본이 나아갈 수 없는 이유이다. 현재 미국의 정책이 6자회담 유지에 있는 이상 미국의 전략적인 의도를 거슬리면서 경제제재를 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만이 대북경제제재를 실시했을 때 그 효과가 크지 않다고 생각하여 일본 단독의 경제제재에 대해서는 주저하고 있다.

이에 비해 고이즈미 수상은 납치문제와 북핵문제에 있어서 일반 정치가들과 다른 정치적인 이익을 고려하고 있다. 고이즈미 수상은 납치문제 해결을 통해 북일 수교를 자신의 정치적인 업적으로 만들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이 성과를 통하여 자신의 지지를 유지하려는 측면도 있다. 이점에서 고이즈미 수상은 이번 북한의 핵 보유 발언에도 불구하고 ‘북일평양선언의 정신에 반하는 면이 있더라도... 교섭의 문을 열어두고 싶다’고 말하면서 북일교섭을 지속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인 것이다. 이러한 점들이 일본의 차분한 반응을 가지게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일본은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촉구하고 있지만 미국과 함께 북한을 6자회담에 이끌어 내는 방법으로서 압박정책에 무게를 둘 것도 예측할 수 있다. 일본이 북핵문제를 바라보는 인식은 미국에 가깝다. 이는 2월 19일 열린 미국과 일본의 2+2회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과 미국은 19일 워싱턴 회의에서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 설득보다는 압박에 무게를 둔 강경한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양국 장관들이 회담 직후 발표한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의 핵 프로그램은 국제사회의 핵 비확산 노력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며 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규정한 데서도 미국과 일본의 강경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특히 이 공동성명에서는 작년 6월 제3차 6자회담에서 미국이 ‘리비아식 해법’을 추구하는 기본입장은 견지하되 불필요하게 북한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취지에 따라 더 이상 쓰지 않았던 CVID(완전하고 검정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와 아주 유사한 표현을 다시 사용했다는 점에서 미일의 강경어조를 알 수 있다. 성명을 통해 미일 양국은 미일관계에 대해 ‘미일 안보동맹의 지속적인 힘과 견고함, 활력을 재확인하고 이를 통해 지역 평화와 안정에 대한 위협을 억지,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역량에 대한 확신’을 나타냈다.

나아가 일본의 마치무라 외무 장관이 ‘북핵 사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유엔 안보리에 상정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마치무라 장관은 국제사회가 시간이 갈수록 북한에 대해 강경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간이 그대로 흐르게 내버려 둔다면 상황이 악화되기만 할 것’이라면서 그 이유는 국제사회가 북한에 대해 점점 강경해질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는 일본이 북핵문제에 대해 압박 정책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 것으로 북한에 대해 한층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일본이 북한의 핵문제에서 일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신중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마치무라 외무장관도 ‘북한이 6자회담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있다. 현 상황은 즉시 안보리에 이행하여 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 외무성 간부는 ‘6자회담 협의를 위한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하면서 안보리 상정 가능성이 북한과의 흥정의 카드로 작용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일본은 압박 정책에 대비하기 위해 국내적으로 대북 제재가 가능하도록 법안의 준비를 해 왔다. 이는 2004년 2월 9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가결된 ‘외환관리법’, 6월 14일 가결된 ‘특정선박입항금지법’, 같은 날 처리된 유사법제 7개 법안 중 ‘해상수송규제법’ 그리고 2005년 3월 1일부터 시행되는 ‘선박유탁손해배상보장법’등이다. 또한 최근에는 ‘북한인권법’ 제정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인권법’은 탈북자 수용여부와 관련하여 여야의 입장 차이가 있어 난항이 예상되고 있다. 제1야당인 민주당은 탈북자는 북한에서 박해를 받은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유엔 난민조약에 기초한 ‘조약 난민’에 준하는 광범위한 보호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비해 여당인 자민당은 탈북자의 신원확인이 어렵기 때문에 치안대책의 배려를 요구하는 법무성의 의견을 받아들여 재외공관에서의 보호는 ‘노력 의무’로 하고 국내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일정한 요건을 만족하는 경우’로 조건을 제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법의 제정 필요성에는 여야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어 법안 통과는 시간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Ⅴ. 결론

일본은 고이즈미 수상 등장 이후 국내정치의 변화와 더불어 국제적인 사건이 상승작용을 하여 적극적인 안보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북핵 문제에서도 일본은 미국의 입장에 동조하여 압박정책으로 기우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동북아 평화에 대한 적극성은 미일동맹을 더욱더 긴밀하게 하기 위한 일본의 전략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는 일중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의 일중 관계는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 참배, 일본의 우익교과서 왜곡 등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패권 경쟁을 할 만큼 긴장되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로서는 미국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야마모토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9.11 사건 이후 중국은 반 테러에 관하여 미국에 협력하고 있으며, 또한 북핵문제에서도 중국은 미국에 협조하고 있다. 일본도 미국의 반 테러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으며, 이라크 전쟁에 지지하여 그 어느 때보다 좋은 미일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즉 미중, 미일의 2국간의 관계가 좋기 때문에 일중 간에도 갈등은 적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일중 양국이 노력하지 않더라도 미국과의 관계로 인하여 일중관계는 안정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이는 일중관계가 미중, 미일의 종속변수이며, 외생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현재의 미중, 미일관계에 위기가 발생한다면 중일관계도 변화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로서는 당분간 중일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은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문제와 반일문제는 앞으로도 상존하겠지만, 이로 인해 중일양국이 군사적으로 충돌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중국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가에 있다. 아시아의 민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의 경제성장에 따른 국민들의 정치참여 욕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인데, 이것을 공산당 일당체제로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이에 대한 중국의 향방이 민족주의를 강화시켜 대만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동북아는 갈등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이 되면 미국은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해 개입할 것이다. 이 경우 일본은 미일동맹에 의해 자동적으로 개입할 것이며 이를 대비하기 위해 군사대국화를 모색할 수 있다. 작게는 중국의 경제성장에 따른 대미흑자가 지속적으로 커진다면 미중관계는 악화될 것이며, 이에 따른 미중 갈등도 예견할 수 있다. 또한 조어도 문제를 둘러싼 직접적인 중일 갈등도 남아 있다. 이 경우 한국이 과연 한미동맹을 축으로 주니어 균형자(junior balancer) 역할을 할 수 있을 지가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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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세종연구소의 수석연구위원이다.
* 이 글은, 아시아 사회과학 연구원이 4월 29일 개최한 ‘동북아 균형자론’ 관련 토론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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