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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평화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과 국가전략

홍완석 (기사입력: 2005/05/14 18:50)  

Ⅰ. 한국 외교의 다중적 도전과 동북아 균형자론

최근 한반도를 위요(圍繞)한 동북아의 지정학적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단극적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패권적 일방주의, 초고속 경제성장을 토대로 초강대국으로 발돋움 하려는 중국의 화평굴기(和平堀起: 평화롭게 일어선다), “경제 거인 정치 난쟁이”이라는 조소에서 벗어나려는 일본의 보통국가화, 체제보장을 확보하려는 북한의 핵 벼랑 끝 전술, 영토 및 역사 분쟁에서 촉발된 민족주의 열풍 현상 등이 상호 중층적으로 오버랩되면서 전략적 불안 요인이 증대되고 있고, 이에 따라 동북아에서 힘과 이해관계의 위계질서를 재구성하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포착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미․중의 전략적 경쟁, 일․중의 패권 경합, 일본의 재무장과 군국주의화 추세, 한․미 동맹관계의 균열, 안개 속에 휩싸인 미제(謎題)의 북핵문제, 동북공정을 통한 중국의 중화질서 재현 야망,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노력, 중․일간 역사 갈등과 센카구 열도 영토분쟁, 한․일간 독도 영유권 및 역사분쟁 등이 그것이다.

동북아의 지정학적 기상도에서 생성되고 있는 이러한 안보적 불연속선은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구현을 중요한 국정 아젠다 가운데 하나로 제시한 참여정부에게 심각한 외교적 도전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동북아에서 전략적 ‘불확실성’의 증대는 외견상 일․중의 패권 경합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일차적 원인은 역내 지정학적 헤게모니를 독점적으로 유지 강화하려는 미국의 일극우위적 외교 전략에서 기인한바 크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가 취한 일련의 동북아 정책, 즉 주변국들의 우려에 아랑곳하지 않은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 강행, 북핵문제의 군사적 해법 모색, 주한 미군의 역외 역할 확대, 일본의 재무장 부추김, 중국과의 대결구도 조성,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창설에 대한 미온적 태도 등을 보노라면 미국이 동북아 전체를 혼돈으로 내몰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미국의 대중정책과 북핵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관찰하면 그런 의구심은 더욱 짙어진다.

클린턴 행정부 때까지 미국은 중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하면서 광범위한 협력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2001년 부시 정권 출범이후 미국은 중국의 위협을 과대포장하면서 중국 고립화전략으로 수정하였다. “중국의 군사력 증강이 대만 해협의 평화와 안정은 물론 아시아 주둔 미군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위협론의 안보관에 기초해 부시 대통령 주변에 위성군(衛星群)처럼 포진한, 소위 네오콘(Neocon)으로 불리우는 신보수주의자(Neo-conservative)들은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중국의 영향력 확대와 세력팽창을 억제하는 봉쇄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 봉쇄정책이 한국에게 주는 안보적 도전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미국이 미․일 동맹체제를 강화하는 가운데 일본을 대중국 견제의 대리인으로 내세우면서 일본의 역사왜곡을 눈감아 주고 재무장과 군국주의화를 부추기며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멍석을 깔아주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미국의 그런 암묵적 지원을 이용해 역사왜곡을 정당화하고 있고, 나아가 헌법개정을 통해 전수방위(專守防衛) 원칙을 해체하면서 아시아의 맹주로 올라서기 위한 야욕을 드러내며 한국과는 독도분쟁, 중국과는 조어대, 러시아와는 북방 4도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다른 하나는 중국과 대만간 양안(兩岸) 분쟁시 주한 미군의 군사적 개입을 겨냥한 전략적 유연성이 한국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제 3국의 전쟁에 휘말릴게 할 수 있는 소지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특히 주한 미군의 역외로의 역할 확대로 요약되는 전략적 유연성은 한국으로 하여금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에 ‘줄서기’를 강요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서울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은 워싱턴의 대북 강경정책도 한․미동맹체제에 균열을 가하면서 한국에게 적지 않은 외교적 고민을 제공한다. 북한 핵, 북한 인권, 북한을 겨냥한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북한의 급변 사태 시 주한미군의 군사적 조처를 상정한 ‘작전계획 5029’ 등에서 한․미간 이견이 깊어졌고, 이 과정에서 워싱턴의 대응 압력이 높아지고 있다. 이 보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미국이 북핵문제에 대한 군사적 해법을 모색하고 있고, 그것이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결코 원치 않는 한국의 사활적 이해를 침해한다는 점이다.

북한을 “불량국가”, “악의 축”에서 “폭정의 전초기지”로 규정하고 대북 강경노선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는 부시 행정부의 성향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재연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다수의 분석가들이 지적하듯, 다자적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미국의 외교적 수사(修辭) 이면에는 이라크전 전후 처리 현안에 외교력을 집중하는 ‘시간 벌기’ 내지는 북한에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하기 위한 일종의 ‘명분 축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의 6자회담 장기 불참과 핵무기 보유선언, 영변 원자로 가동중단 이후 북핵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안보 시계가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6자회담 불참 1년째가 되는 6월 말을 워싱턴이 인내할 수 있는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미국 내에서는 북한을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거나 아니면 경제제재를 가하자는 강경론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북핵문제가 해결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여름을 넘기게 되면 정말 심각한 위기국면이 도래할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에 동시다발적으로 엄습한 일련의 대외적 도전들, 이를테면 북핵 위기의 고조와 함께 대북정책에서 한미간 이견 노정, 한반도에 대한 종주권을 복구하기 위한 중국의 동북공정, 점차 강도가 높아지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역사왜곡 그리고 군사대국화 추세, 여기에 미국·일본·중국 등이 줄서기를 압박하는 동북아정세는 노무현 정부에게 자구적 차원의 새로운 대외정책 패러다임의 모색을 요구했다.

그 동안 자주외교, 협력적 자주국방, 신 한ㆍ일관계 독트린 등을 천명해 왔던 참여정부는 오랜 숙고 끝에 결국 동북아 균형자론을 제시하면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주변 4강이 엮어내는 복잡한 역학구도에서 한국이 특정 강대국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던 ‘동맹외교’ 틀에서 일정수준 벗어나 한반도 및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담보하기 위해 역내 국가들간의 갈등을 균형적으로 조정하는 적극적 행위자가 되겠다”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한국의 신 외교 독트린으로서 참여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100년 전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 각축전 속에서 자강능력을 결여한 한국이 늘 주변국들의 힘에 휘둘려 왔고 결국 국권 상실로 이어졌다는 통절한 역사 인식에 기초한다. 그리고 변방의 역사로부터 공존공영의 가치를 체득한 비패권 중견국가로서 국격(國格)과 독자적 역량을 구비한 한국이 이제 대립과 갈등의 불안정한 동북아 역학구조를 상생과 협력의 선순환 구조로 전환시키는 하나의 균형 잡힌 독립변수로 자리 메김하고, 이를 통해 평화와 번영의 21세기 동북아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어나가겠다는 강한 의지에서 출발한다.

참여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그 개념의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이론상 합리적 충분성이 있다. 국내 및 국제사회의 일각에서는 나름대로의 논거를 제시하면서 동북아 균형자론의 허구성, 취약성, 현실적 제약성을 지적한다. 물론 동북아 균형자론은 한국의 종합적 국가역량 상 그 실효성을 확보하기에 여의치 못한 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국이 스스로의 위상 변경을 통해 21세기 한반도 및 동북아 역사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외교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한국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자주적인 세력균형정책을 펼쳤던 고구려 시대를 제외하고는 근 천년간 중국을 사대(事大)하는 조공체제에 안주해 왔고, 20세기 전반기에는 일본 군국주의 식민지배의 굴종을 경험했으며, 20세기 후반 이후에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포섭되어 국권 확보를 위한 편승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다. 그런데 이 대미 편승정책은 다양한 선택들을 둘러싼 전략적 사고의 결과라기보다는 미국으로부터 강요받은 선택 부재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사대, 굴종, 편승외교와는 격을 달리한다. 외교적 수사(修辭)를 제거하면 좁게는 수직적 종속적 한․미 동맹 구조에서 수평적 능동적 동맹 틀로의 전환을, 넓게는 한국외교의 독자성 내지는 주체성 확립을 의미한다. 문제는 한반도가 여전히 미․중․러․일로 대표되는 세계적 권력보유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특히 안보와 경제 영역에서 한국의 생존을 위한 사활적 환경을 제공하고 있기에 그 어느 한쪽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미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이 지정학적 경쟁을 본격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이 과연 어떠한 전략적 유연성을 갖고 이들 양자간의 중첩된 이해관계를 수렴시키느냐가 중요한 외교적 과제로 남는다.
요지는 합종연횡과 이합집산의 길항작용(拮抗作用)이 연출되는 새로운 동북아 국제정세 속에서 한반도에 깊은 이해관계를 투영하고 있는 주변국들을 상호 협력과 공존의 도정으로 인도하고, 이 과정에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외교적 대응책을 강구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참으로 지난(至難)한 외교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동북아 균형자론의 유효성을 담보하는 외교적 방안 마련은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대한 주변국들의 입장과 전략을 면밀히 파악하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한국외교의 대상들이 모두 ‘움직이는 목표물’(moving target)이고 동시에 자신도 쉬지 않고 ‘변동하는 행위주체’(moving actor)라는 동태적인 방법론에 입각하여 국제관계에 대한 관성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에 기초한 역학관계를 간파할 수 있어야한다. 정확한 예측에 기초한 적절한 정책입안 및 조절을 통해 비로소 참여정부가 지향하는 동북아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한 균형자 역할이라는 외교목표의 효과적 달성이 보장되며, 그러한 적극적 조정은 정책의 장기적 일관성을 가져다줌으로써 주변강대국들과의 신뢰를 형성 축적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글의 목적은 동북아의 핵심적인 지정학적 행위자 가운데 하나인 러시아의 동북아 평화에 대한 입장과 전략을 살펴보고, 한국이 동북아 갈등의 조정자 내지는 공존공영의 협력질서 창출 촉진자로서의 역할을 적극 모색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의미를 파악하며, 이를 토대로 러시아를 참여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 구상에 힘을 실어주는 우호적 협력세력으로 유도하는데 요구되는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데 있다.

Ⅱ. 동북아 평화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과 전략

1. 동북아 평화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

지정학적 이익에 대한 전략적 관리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범세계적 규모의 정치․군사적 안보와 관련하여 러시아의 운명을 결정하는 핵심적 대외 공간은 유럽과 동북아이다. 이는 러시아가 위치한 유라시아 대륙의 양 날개에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경제적 생산성이 높은 6대 경제대국과 강한 ‘근육질’의 군사대국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유럽과 동북아는 세계의 지정학적 중추인 유라시아 대륙의 안정적 관리와 러시아 국익의 창조적 확대에 사활적 중요성을 지닌 ‘생명선’과도 같다.

신 러시아 연방 출범 이후 모스크바가 대외정책 영역에서 일관되게 표방한 외교 주제는 국내개혁의 성공적 완수를 위한 유리한 대외적 환경 창출이다. 러시아는 여전히 시장개혁의 심화, 경제성장, 정치적 안정 등 내적 동력을 확보하는데 전력투구해야 하는 국가적 과제에 직면해 있고, 그런 점은 푸틴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푸틴 정부는 2004년 대외정책의 과제를 제시하면서, 러시아 외교의 주된 방향이 평화로운 안보환경 조성에 집중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주변정세 특히 국경선의 안정은 러시아의 정치․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담보하는 일차적인 외적 조건이 된다.

러시아는 체첸 내전 그리고 그루지야, 아프카니스탄, 중앙아시아 등 국경지역에서의 무력분쟁에 오랜 기간 시달려 왔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력이 고도로 밀집해 있고 동시에 일촉즉발의 군사적 긴장에 상존해 있는 동북아는 러시아 지도부에게 항상 근심의 원천을 제공한다. 높은 휘발성을 지닌 영토 마찰이 주변국들 사이에 그물처럼 얽혀 있고, 여전히 냉전구도가 상존해 있는 동북아에서의 무력분쟁은 지구상 여타 분쟁과는 달리 곧 바로 핵전쟁, 강대국간의 전쟁으로 비화할 파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접경지역 동북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이는 성장의 동력을 갉아먹는 불필요한 막대한 안보비용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차단해야 할 안보적 과제에 해당한다. 그런 측면에서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유지는 러시아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필수적이다.

2. 러시아 동북지역 안보위협에 대한 모스크바의 인식과 정책

현재 러시아 동부 국경지역에서의 안보적 여건은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을 이루고 있다. 소연방 붕괴가 결과한 권력진공으로 러시아는 영토의 서쪽날개에서 안보적 침식작용을 경험하고 있다. CIS 제국의 독립으로 러시아 서부 국경선은 축소되었고, 동구제국의 주권회복과 이들 지역에 대한 나토의 무차별 동진 팽창으로 러시아의 전통적 세력권 또한 현저히 잠식되었다. 그러나 동북아 방면에서는 국경선 변동도 없고, 러시아의 영토 공간을 훼손하는 가시적인 위협 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유럽방면에서와는 달리 동북아 세력균형체계가 파괴되지 않았고, 러시아와 인접 국가들과의 관계가 크게 개선된 데에 기인한다.

그러나 모스크바 전략가들은 동쪽 국경이 지니고 있는 안보적 취약성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우려를 보내고 있다. 러시아 극동연구소(Интитут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а РФ РАН)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동부 국경지역에는 안전보장을 위한 효과적인 완충지대가 없다는 점, 소연방 해체 이후 극동방면 군사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는 점, 극동지역이 지전략적 종심(縱深)인 모스크바로부터 원거리에 있어 병참적 위치가 취약하다는 점, 광활한 영토에 비해 인구 밀도가 지나치게 낮다는 점 등을 거론하면서 러시아 극동지역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 안보전문가들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중․장기적인 전망에서 러시아 동북지역 영토적 안전보장과 안보이익을 손상시킬 수 있는 잠재적 위협요인으로 크게 다음 세 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있고, 이의 차단을 주요 안보목표로 삼고 있다.

1) 중국의 잠재적 위협 제거

현하 러시아와 중국은 양국간 전략적 협력 수준에 있어 유사 이래 최고의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대한 러시아 지도부의 안보적 불신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몽고 타타르의 ‘멍에’라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황화론’(黃禍論)에 대한 피해의식, 3645 km에 달하는 방대한 국경선의 공유로 인한 위협의식의 영속성, 국경선을 따라 정착하고 있는 엄청난 수의 중국인의 ‘인구압박’(Демографическое давление), 욱일승천하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아시아질서의 맹주, 즉 중화질서 구축을 기도하는 중국의 야망 등이 러시아 전략가들에게 안보에 대한 적지 않은 심적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 군부 및 안보전문가들은 역동적인 경제성장과 군비 현대화를 기반으로 점차 세계정치의 파워 센타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발호에 강한 경계감을 늦추지 않고 있고, 중국의 팽창주의적 성향에 대해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특히 이들은 통제되지 않은 대중 첨단무기 제공이 장래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할지 모르는 무기 수출 ‘부메랑’ 가능성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연방초기 러시아 군산복합체의 강력한 로비와 서방에 대한 반발력으로 무분별하게 매각되었던 대중 첨단무기 수출이 최근 엄격한 원칙 하에, 이를테면 지역 정세의 안정성 저해 여부, 국제적 비확산 규범의무 준수, 러시아의 장기적 안보 위해성(危害性) 여부 등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러시아의 안보에 있어 중국은 기회적 요인과 도전적 요인을 동시에 제공하는 ‘파머콘(Pharmacon)’적 양면성을 지닌다. 미국의 패권적 전횡과 나토의 파상공세에 대응할 수 있는 세계적 차원의 우군을 확보하는데 있어 중국은 분명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다. 그러나 러․중 양국이 추구하는 지정학적 이해관계의 근본적인 불양립성과 유구한 세월 영토대국과 인구대국 간의 방대한 국경선의 공유로 인한 상호 안보적 위협 인식의 항상성(恒常性)으로 볼 때, 중국은 러시아 동북부 국경선의 안보를 훼손할 수 있는 최대의 잠재적 도전세력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안보적 차원에서 러시아의 대중 전략은 ‘반미․반패권주의’라는 동일한 가치관에 기저해 중국과 세계적 수준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연중(連中)정책’과, 동시에 중국의 성장이 러시아의 안보에 위협적 요소가 되는 것을 방지하는 ‘견중(牽中)정책’을 효율적으로 관리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외교를 견제하는 수단으로서 중국과 전략적 협력관계를 유지ㆍ강화해 나가는 한편, 여러 사안들에서 미국 및 일본과 선택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자신의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인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2) 일본의 북방영토 반환요구 차단

탈 대결의 새로운 국제정치적 환경을 맞이하여 러시아는 과거 소모적 대립으로 일관하였던 일본과의 관계를 1998년 “전략적, 지정학적 이익에 합치하는 창조적 동반자관계”로 진입시켰다. 그럼에도 일본의 집요한 쿠릴 4도(쿠나시리, 이토로후, 시코탄, 하보마이) 반환요구는 여전히 러시아 동부 국경선의 안정을 저해하는 안보적 위협요인을 제공한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흑해와 발틱해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 상실에 따른 쿠릴열도의 상대적 전략적 가치 증대, 북방4도의 양도가 초래할 수 있는 인접 국가들의 영토반환 요구의 연쇄반응 우려, 미․일 신 동맹체제의 강화(1997년 미․일 신 방위협력지침), 일본의 착실한 재무장과 군사적 역할 확대 등을 고려할 때 북방영토는 결코 양도할 수 없는 지켜야할 핵심적인 안보이익이다. 북방 4도 반환불가 입장은 2000년 1월 푸틴 대통령이 집권과 동시에 발표한 ‘신(新) 국가안보개념’속에 확고히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푸틴은 외국의 “러시아에 대한 영토요구”를 중대한 안보적 위협의 하나로 명시하였는데, 이는 다분히 일본을 의식한 것으로서 북방영토를 양도할 의사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아단계의 시장경제체제의 정착과 시베리아 극동지역 개발 촉진이라는 당면한 국가 경제적 과제가 러시아로 하여금 일본과의 불필요한 ‘적대면’(敵對面)의 최소화와 ‘우호면’(友好面)의 최대화를 요구한다. 요컨대 러시아는 일본의 막강한 경제력 유인 필요성이라는 현실적 이해 때문에 북방영토문제와는 별도로 우호적 상호작용을 강화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볼 때 러시아의 대일 전략은 철저히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중층적 접근법에 기초한다. 즉, 실리적 측면에서 일본과의 경제적 협력작용 강화를 추구하나, 안보적 차원에서는 쿠릴 4도의 반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는 접근법을 견지한다. 아울러 러시아는 북방영토라는 유용한 ‘지렛대’를 통해 미국과 일본을 분리하여 미․일 군사동맹 체제를 이완시키고 일본의 경제적 유인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구사한다.

모스크바는 일본을 동아시아의 강력한 주도국가로서 인정하지만, 일본의 안보전략이 미일동맹 틀을 경직되게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틀 위에서 지역 강대국 역할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은 전략적 협력의 상대로는 간주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는 사실상 ‘정상국가화’된 일본에 대해 자신의 국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 방관의 태도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을 통해 외부로 투사되기 시작한 일본의 힘이 지역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중국에 대한 견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3) 한반도 비핵지대화와 군사적 충돌 예방

러시아는 구 소련과 마찬가지로 접경지역에 핵이 없는 상황을 중요한 안보이익과 연결시키고 특히 극동지역의 안정과 핵의 수평적 확산 방지를 위해 한반도 비핵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의 핵 보유는 남한, 일본, 대만을 자극하여 핵 확산을 유발할 것이 자명하기에 러시아의 안보이익상 결코 용납할 수 없다. 평양과의 우호적 협력작용의 강화에도 불구하고 푸틴 정부가 북한의 핵 개발 반대와 IAEA 사찰 수용 그리고 NPT체제 준수 등을 일관되게 강조한 점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소연방 해체 이후 러시아는 사회주의라는 왼손잡이에서 자본주의라는 오른손잡이로 전환하는데 요구되는 국가 시스템의 개조와 개혁 작업에 국가적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다. 이런 국내적 현실의 충족, 즉 조속한 시장경제체제의 착근과 정치사회적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푸틴 정부는 평화롭고 안정적인 주변 정세 조성을 중요한 외교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국경선을 마주한 동북아의 화약고 한반도는 안보적 차원에서 러시아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크레믈린 전략가들은 과거 막대한 물적, 인적 손실을 수반한 아프카니스탄 전쟁 10년이 소련 경제를 거덜 내고 그 붕괴를 앞당겼다는 악몽을 잘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러시아의 경제성장을 지체시키고 정치적, 안보적 재앙만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 하에 한반도의 긴장완화,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남북대화의 촉진 등을 일관되게 지지하고 있다.

동시에 한반도의 안정을 담보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들도 강구해 왔는데, 1996년 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방지하기 위한 자동군사개입조항의 파기; 북한의 세계미사일통제체제(GCS) 가입 유도; 2000년 러․북 우호조약에서 미국의 대북 선제 군사공격을 제어하기 위한 ‘유사안보조항’의 삽입; 친남한노선에서 남북한 등거리노선으로의 전환; 대북 첨단무기 공급자제; 북한의 개혁과 개방의 지원; 북핵문제의 유엔 안보리 상정 반대; 북한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교차승인 요구 등은 모두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예방하고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반영한다.

3. 동북아 안보환경과 러시아의 전략

현하 동북아 지역은 탈냉전의 “세계적 보편성과 지역적 특수성이 동시에 엮어내는 역동성”으로 인해 ‘통합’과 ‘분열’의 흐름이 중첩적으로 교차하는 기이한 지정학적 기상도를 보이고 있다. 먼저 통합의 흐름은 냉전 후 시대가 연 일종의 “기회의 창”으로서, 국제관계의 확장과 경제적 상호의존성의 심화에 따른 다원론적 지역협력기제의 태동을 들 수 있는데, 이는 ASEAN, APEC, ARF 등으로 대표된다.

분열의 저류는 탈냉전으로 이념의 접착제가 사라짐에 따라 냉전기간 동안 진영 공동의 이익을 위해 억압되고 희생되었던 다양한 국가이익 분출의 산물이다. 미․소 양극구도의 종식은 전후 국제질서를 지배했던 가지런한 이열종대를 해체시키면서 민족단위 국가이기주의의 분출을 촉발시켰다. 국가 이기주의의 출현은 진영간의 대립을 개별국가들간의 대립으로 전이시키는 동인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현상은 동북아에서 역사분쟁, 영토마찰과 이와 밀접한 친화성을 갖는 군비증강 그리고 강대국간 헤게모니 투쟁, 특히 미․중 및 일․중간 지정학적 경쟁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체적으로 현 동북아 전략 환경은 분열과 융합의 양면성을 내포하는 준(準) 안정적 상황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요컨대 잠복성 분쟁의 씨앗이 경제적 상호의존성의 증대라는 거대한 시대적 조류에 압도되어 잠정적으로 안정을 누리고 있지만, 순식간에 붕괴될 가능성이 있는 불안정 속의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준 안정성은 유연성을 지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외적인 경직성을 흡수하지만, 강력한 충돌로 인한 연쇄효과에는 취약하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적 측면에서, 경제적 공동번영과 안보비용 경감을 위해 요구되는 화해와 협력의 유연성이 대립과 갈등의 경직성을 제어하고 있다. 이는 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대이익이 기대비용보다는 적다는 역내 국가들의 냉철하고도 숙고된 정세관에 기초한다. 그럼 여기서 러시아가 동북아에서 추구하고 있는 안보전략을 파악하기 위해 역내에 내재된 안보적 위협 요인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동북아지역에는 아직까지도 ‘냉전의 유산’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러․일 관계에서는 북방 4도서를 둘러싼 원칙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고, 한반도와 중국의 양안(兩岸)에서는 여전히 첨예한 정치․군사적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현재까지 조정되지 않고 있는 이 3가지 냉전의 유물은 동북아 지정학적 정세에 불확실성을 심화시켜 주면서 항구적인 긴장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둘째, 동북아를 포함하여 아․태지역에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간의 경쟁이라는 ‘체제간 대립 구도’(Межсистемные отношения)가 여전히 상존해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몰락과는 관계없이 중국, 북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등 이른바 일련의 아시아 레닌주의 국가군은 ‘자주적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를 수용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일당독재와 사회주의체제의 고수를 외치고 있다. 이에 미국을 위시한 서방진영은 기본적으로 아시아 사회주의국가, 특히 중국 및 북한에 대해 선택적 봉쇄정책을 구사하고 있는데, 이는 아직도 동북아 지역이 냉전체제의 구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셋째, 군비축소의 시대적 조류와는 달리 동북아는 경쟁적으로 군비경쟁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북 군사적 우위 확보를 위한 한국의 지속적인 전력증강 사업; 역동적인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힘의 “외부투사 능력”(power projection capability)과 “연장능력”(power extension capability)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국; 중국의 무력 흡수통일 가능성 차단을 위한 대만의 자위력 강화; 자신의 경제력에 상응하는 정치․군사적 대국화를 희구하는 일본의 재무장; 체제 생존을 위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제조 및 독자적 핵 개발 등은 모두 동북아 군비경쟁의 현주소를 웅변한다.

동북아 군비경쟁 원인은 다양한 수준에서 설명이 가능하나, 무엇보다도 역내 국가간 중첩적인 역사적 반목에 따른 안보적 상호불신에서 비롯된바 크다. 즉, 한 국가에서의 군사력 증강이 다른 인접국 또는 경쟁국에 대해 ‘안보딜레마’(security dilemma)를 제공하여 작용-반작용의 연쇄적 군비경쟁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아에서 과잉 군비확장은 아직도 군사력이 지역적 차원의 세력균형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동북아가 민족단위의 국가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국익과 힘에 기초한 현실주의적 국제관계 기제가 강하게 지배하는 공간임을 표징(標徵)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동북아에 뿌리 깊은 역사적 연원을 지닌 복잡다기한 ‘영토분쟁’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일간 독도 영유권 갈등; 러․일 쿠릴 4도 분쟁; 조어도(釣魚島)를 둘러싼 중국․대만․일본간의 암투; 중국․대만․베트남 3국간 서사군도(西沙群島) 마찰; 남사군도(南沙群島)를 둘러싼 중국․말레이시아․대만․필리핀․베트남․브루나이 등 6개국간 대립 등이 그것이다. 탈냉전이후 두드러지게 노정된 일련의 영토분쟁이 대규모 전쟁으로까지는 비화되지 않고 있으나, 긴장의 주기적 고저(高低)를 반복하면서 동시에 군비경쟁과 맞물리면서 동아시아 안보불안의 구조적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동북아 영토마찰에 현미경을 들이대 보면 다음 세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첫째, 동북아가 러․중, 러․일, 일․중 등 강대국간 영토분쟁이 존재하는 유일한 국제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그런 연유로 세계적 강대국들이 연루된 동북아 영토분쟁은 현재 경제적 번영과 협력 추세에 의해 은폐되어 있으나, 제어력을 상실한 국가적 야망이나 민족주의적 감정에 의해 점화될 경우 높은 휘발성과 폭발력을 지닐 수 있다. 둘째, 영토분규의 대상이 주로 해상의 도서(島嶼)라는 점이다. 영토분쟁 지역이 직접적인 국경선을 마주하지 않은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이 역내 국가간 대규모 군사적 충돌의 우발성과 민감성을 일정부문 완충시켜주고 있다. 셋째, 동아시아 영토분쟁 핵심 연루국가가 암묵리에 세력권 확대를 모색하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점이다. 이는 중․일의 영토 집착력을 반영하는 한편, 향후 양국의 팽창주의적 권력욕이 발동될 경우 그 첫 총성은 영유권 사수를 명분으로 한 영토분쟁에서 나올 가능성이 높음을 암시한다.

전기(前記)한 바처럼 동북아에는 미․중 및 일․중의 패권경쟁, 한반도와 중국 양안지역에서의 군사적 대치, 체제간 대립이라는 냉전구도의 존속, 과도한 군비증강, 크고 작은 영토분쟁,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및 핵개발 문제 등 잠복성 분쟁의 지뢰밭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모스크바 안보 전문가들은 이러한 동북아 안보환경의 불확실성이 상황여부에 따라 러시아 동북지역의 안정은 물론이고 안보이익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크레믈린 전략가들은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를 담보하는 가운데 역내 국가들 사이의 영토적, 민족적, 정치적 분쟁을 희석․흡수․통제할 수 있는 일종의 ‘위기 해소체’가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가장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유럽의 OSCE(유럽안보협력기구)와 같은 동북아 다자간 안보협력 레짐 구축 필요성을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다.

다자간 안보체제 창설은 사실 과거 소연방시절부터 러시아가 동북아 지정학적 공간에서 일관되게 주장해왔고, 또 그 실현을 위해 외교력을 집중했던 중요한 안보적 차원의 전략목표였다. 현재에 있어서도 러시아는 동북아 4강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다자간 안보체제 창설을 관철시키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역내에 제도화된 안보협력 기구가 구축될 경우 러시아가 최대의 수혜국이 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에 기초한다. 러시아의 동기와 욕구를 자극하는 보다 구체적인 상황적 논거를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동북아 다자간 안보협력 기제의 창설은 반은 낯설게 남아있고 이질적 문화에 직면해 있는 러시아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아시아세력으로서의 발판을 제공받게 함과 동시에 소연방 해체 이후 이 지역에서 위축된 외교적 활동영역을 넓혀줄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가 된다. 아울러 역내분쟁 발생 시 자연스럽게 러시아가 중재함으로써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지정학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다. 둘째, 충분치 못한 재정여건 속에서 국가안보의 ‘홀로서기’는 러시아 경제에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 되기 때문에 동북아에 다자간 안보기제를 구축할 경우 강력한 미․일 동맹체제에 노출된 러시아 동부국경선의 안전을 효과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 셋째, 군사력의 약화와 군비감축으로 인한 러시아 극동지역 방위력의 취약성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자간 안보 메카니즘의 구축을 통한 역내 군비 축소 및 통제가 필요하다. 넷째, 다자간 안보체제에 무임승차함으로써 워싱턴과의 불필요한 지정학적 마찰을 우회하면서 안보의 쌍무관계에서 월등히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의 안보 주도권에 제한을 가할 수 있다.

다중적(多重的) 안보이익을 보장해주는 이 모두는 궁극적으로 러시아의 동북아 안보주도권 확보로 수렴된다. 이런 배경에서 러시아는 역내 다자간 안보체제 창설을 핵심적인 안보전략 목표로 삼고 있고, 이의 제도화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가 주창하는 역내 다자안보 레짐은 미국의 부정적 반응과 중국 및 북한의 소극적인 태도에 부딪쳐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반대국가들에 대한 집요한 설득과 병행하여 호의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 일본 및 한국과의 정치적 교감신경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핵 6자회담 참여를 통해 동북아 안보 공동체 창설을 위한 기반조성에 강한 집념을 보이고 있다.

Ⅲ. 참여정부의 주요 전략과제에 대한 한․러간 정책 비교

한국이 동북아 갈등의 조정자, 협력과 상생의 협력질서 창출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적극 모색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참여정부의 주요 전략과제에 대한 한․러 양국의 입장과 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의 선행은 향후 참여정부의 대러정책 방향성 수립뿐만 아니라 동북아 균형자론 역할 구현을 위해 러시아로부터의 지지 방안을 강구하는데 요구되는 필수 불가결한 기초공사에 해당한다. 본장에서는 한반도 평화 및 동북아 공동번영과 관련된 다음 세 가지 주요 이슈, 즉 1) 북핵문제, 2)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 3)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1. 북핵 문제

2000년 초 푸틴 정권 출범이후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실추된 영향력 복구를 위해 대북 접근을 현저히 강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 시위에 따른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고조는 러시아에게 다중적인 ‘근심거리’를 제공한다. 러시아의 고민은 일차적으로, 이라크와는 달리 약 17 Km의 국경선을 접한 한반도가 러시아 동북지역 안정과 구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안보적 우려에서 출발한다. 우선 북한의 핵 보유는 대만, 남한, 일본 등 잠재적 준(準) 핵국들의 연쇄 핵무장을 촉발시켜 동북아의 전략적 안정화를 저해하고, 미국의 MD 구축과 일본의 재무장 빌미를 제공하며, 이는 상황 여부에 따라 러시아 극동지역 안보를 훼손하는 중대한 안보적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

동시에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은 러시아의 안보이익 상 개입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전략적 딜레마를 안겨준다. 북한을 포기하지 않는 한, 지정학적으로도 결코 원치 않는 미국과의 관계악화가 필연적으로 수반되며, 북한체제 위기에 따른 탈북 난민의 극동지역 유입은 러시아에 적지 않은 정치적 부담이 된다. 북한 영변 지하 핵 시설에 대한 미국의 제한 폭격시 심각한 방사능 낙진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 측면에서 한반도에서의 분쟁은 낙후된 시베리아 극동지역 개발을 위한 야심찬 일련의 계획이 차질을 빚게되며, 연간 10억 달러 이상의 통과 수익이 기대되는 시베리아횡단철도와 한반도종단철도와의 연결사업에도 중대한 지장을 초래한다. 결론적으로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갈등은 러시아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로슈코프(А. Лосюков) 전 외무차관의 지적처럼, 북핵 위기에 따른 한반도에서의 무력충돌은 러시아에게 한마디로 재앙이자 백해무익한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이는 러시아가 미국의 대북 선제 군사공격 가능성을 시사하는 “제 2 영변 위기”가 고조되자, 동북아 4강 가운데 가장 먼저 적극적 중재자임을 자처하고 나선 이유를 구성한다.
푸틴의 러시아는 2003년 1월 로슈코프 외무차관을 남북한, 중국, 일본, 미국 등 관련당사국에 북핵 특사로 파견하고,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포괄적 해법으로 ‘일괄타결방안’(пакетное решение)을 제시하였다. 러시아가 제안한 일괄타결방안은 다음 세 가지 원칙, 즉 1) 한반도 비핵화, 2) 북한체제에 대한 안전보장, 3) 대북 지원 재개를 강조하고 있다. 먼저 한반도 비핵화를 보장하는 가운데 1994년 제네바 북․미 합의를 포함한 모든 국제협정상의 의무사항에 대한 관련 당사국들의 철저한 이행이 준수되어야 하고, 양자간 또는 다자간 방식의 건설적인 대화를 통해 대북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며, 마지막으로 북한에 대한 인도적-경제적 지원 프로그램을 재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적 방법과 외교적 수단에 의한 북핵 문제 해결로 압축되는 러시아의 제안은 “북한이 핵무기를 갖는 것도 원치 않지만 미국의 대북 물리적 제재에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한반도에서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모스크바의 입장을 우회적으로 판독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러시아의 포괄적 해법은 북한과 미국의 입장을 동시에 고려한 것으로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 판(version) 페리 프로세스’로 지칭할 만하고 참여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로드 맵’과 크게 다르지 않다.

2.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

참여정부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구상은 남북이 당사자로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유관국이 이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것이다. 아울러 평화협정 체결 협의를 위한 남북 및 유관국간 회담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화해 협력 단계에서는 한반도에서 정전협정이 준수되어야 하고, 남북한 당사자가 평화협정으로 바꿀 때까지는 정전협정이 유효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북한은 1950년대 중반부터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면서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제기했고, 철저히 남한을 배제하는 가운데 미국과의 북․미 평화협정 체결만을 줄곧 요구해왔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간 해결원칙에 따라 북․미 평화협정에는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우리 정부와 미국이 정전체제 고수 입장을 견지하자, 북한은 1991년부터 군사정전위와 중립국감독위를 유명무실하게 하는 전략을 구사함과 동시에 일련의 비무장지대 불인정 조치(비무장지대 정찰활동, 판문점 무력시위, 휴전선지역 근접 비행 등)을 통해 의도적으로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킴으로써 평화체제 전환 논의를 위한 북․미협상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한반도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과 관련하여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한반도 평화구도 정착의 제도화라는 측면에서 북한의 주장에 동의한다. 즉, 남북간 군사적 대치상태를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필수불가결하며, 또 러시아의 정치적 개입 명분을 봉쇄하고 있는 현 정전체제가 한반도의 현실 상황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 하에 평화체제로의 전환 당위성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한반도 평화체제 전환 필요성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남북간 실질적인 평화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한국과 미국이 주장하는 현 정전체제 고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이를테면 “남북간 실질적인 긴장완화 노력이 더 필요하고 상호 동의된 대안으로서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현 정전협정이 계속 준수돼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그런 입장은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이 결과한 한․러 공동성명 제 7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러시아는 “지난 1991년의 남북간 기본합의서를 토대로 새로운 평화체제가 구축될 때까지 현재의 정전체제가 유지돼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함으로써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려는 북한의 기도에 제동을 걸었다.

러시아가 북한의 의도와는 배치되는, 한국의 정전체제 유지 입장을 지지한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무력시위를 동원한 북한의 무리한 정전체제 와해 기도가 러시아의 대한반도정책 핵심 목표인 역내 평화와 안정을 저해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만을 상대하겠다는 북한의 요구가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역할 공간을 제한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배경에서 러시아는 미국과 단독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는 북한의 태도에 비판적이고,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만 가중시키는 북한의 정전협정 무력화 조처에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러시아의 구상을 요약하면 이렇다. 정전체제가 이미 효력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지만 새로운 체제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폐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고, 새로운 평화체제는 남북 공동의 노력으로 마련돼야하며, 이를 러시아를 포함한 유관국이 국제적으로 추인하고 보장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러시아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구상은 참여정부의 그것과 전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

3.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

노무현 정부는 21세기 한국의 국가발전과 동북아의 공동번영을 구현하기 위한 국정 아젠다로 이른바 ‘동북아시대 구상’을 제시하고 있다. 동북아시대 구상은 ‘동견동리’(同見同利: 가치의 공유, 이익의 공유)라는 비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한국이 보유한 천혜의 지리적 조건, 즉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이어주는 가교국가로서의 유리한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여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공동체” 건설을 주도하고, 이런 미래지향적인 전략적 포석을 통해 궁극적으로 한국이 인적·물적 교류의 중심 고리로서 동북아 물류, 관광, 금융의 허브국가가 되는 것을 핵심 추진 목표로 상정하고 있다.

푸틴의 러시아 또한 낙후된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개발을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설정하고, 이 지역을 러시아 국가발전의 심장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고 있다. 말하자면 야심찬 ‘시베리아 극동지역 장기발전 프로그램’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그 견인차로 푸틴 정부는 대규모 에너지 개발 프로젝트와 TSR-TKR 연결사업 성사에 국가적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러시아는 자국의 동시베리아 및 극동지방의 경제발전을 위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롭고 안정적인 안보환경을 원하고 있으며, 위 지역이 동북아 공동번영을 위한 자원 공급처이자 산업기지가 되기를 원한다. 세계 유일의 유라시아 국가로서 유럽과 동아시아를 잇는 육상 가교가 되어 ‘위대한 러시아’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이것은 러시아 국가발전 전략의 가장 기본적인 비전이다.

이러한 러시아의 자아상은 참여정부의 동북아시대 구상과 그 밑그림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여기서 노무현 정부가 제시한 동북아 허브(Hub) 국가 건설 또한 푸틴 정부의 시베리아 극동지역 장기발전 프로그램과 동일한 코드라는 점을 알 수 있다.

Ⅳ. 동북아 균형자 역할에서 러시아의 의미와 비중

참여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탈냉전, 경제적 상호의존성 증대, 그리고 문화적 동질감에도 불구하고 역내 국가간 결속력을 저해하는 북핵문제, 영토 및 역사 분쟁, 중국․대만간 양안 위기 등 일련의 도전 요소들을 상생과 협력의 선순환 구조로 전환시키고, 이 과정에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국가의지의 표출로서, 이는 “대립과 갈등의 동북아”에서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로의 새로운 질서 창출을 추구하는 참여정부의 외교전략이자 지역적 차원의 미래비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볼때 동북아 균형자론은 탈냉전이라는 구조적 변화를 활용하면서 주체가 갖는 자율성을 증대시키고 주변국들과의 능동적인 상호작용의 강화를 통해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주도적으로 추구하는 통일․외교전략의 구조적 전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동북아 현실정치의 역학관계를 감안하고 한국의 총체적 국력을 숙고할 때, 참여정부가 아무리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더라도 한반도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적 권력보유자들의 협력 없이 동북아 균형자 역할 실현은 결코 순탄할 수 없다. 참여정부가 지향하는 동북아 갈등의 조정자 내지는 공존공영의 협력질서 창출 촉진자 역할은 주변 4강의 적극적 조응 여부가 그 성패를 가늠하는 핵심적 관건인 것이다.

이 가운데 러시아가 동북아 균형자론의 실효성을 확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게 필자의 기본 시각이다. 요컨대 동북아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한 조정자, 촉진자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주변 4강 가운데 상대적으로 러시아가 한국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우호적 협력세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한국과 러시아가 한반도 및 동북아에서 상호 추구하는 국익 구조를 분석해 보면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참여정부의 중요한 전략과제인 동북아 허브(Hub) 국가 건설은 푸틴의 러시아가 최근 국가적 명운을 걸고 추진 중인 두 개의 중요한 국책사업, 즉 동시베리아와 사할린 유전 및 가스전 개발사업, TSR-TKR 연결 프로젝트와 분리하여 설명할 수 없다.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러시아는 한반도의 비핵화, 북한의 국제적 비확산 체제 유지 및 제네바 합의 준수,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 반대, 대화에 의한 평화적 해결 등을 일관되게 주장해왔고, 러시아가 제시한 일괄타결방안(Package Plan)도 참여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로드 맵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구상과 관련해서도 러시아는 현 정전체제의 유지, 남북대화의 촉진, 한반도의 긴장완화, 평화협정의 남북한 당사자 체결 원칙 등을 지지하고 있는데, 이 또한 참여정부의 입장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밖에 남북한 종단철도를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하는 유라시아 교통연계망 구축, 동북아 에너지협력체 구성,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 창설, UN의 국제적 역할 강화 등에 대해서도 한․러 양국의 전략적 인식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위에 적시한 바처럼, 참여정부의 주요 외교목표가 러시아의 한반도 및 동북아 국가전략과 유사할 정도로 밀접하게 맞물려 있고, 또 한․러 양국이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상호 추구하는 국익구조가 상당부분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협력질서 창출을 위한 참여정부의 전략적 구상을 실현함에 있어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크다 하지 않을 수 없고, 이와 비례해 한․러간 동반자적 관계발전을 심화시킬 필요성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그 필요성은 참여정부가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 구상을 통해 주체적인 중장기 국가발전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한반도를 위요한 동북아의 지정학적 공간에서 역내(域內) 힘과 이해관계의 위계질서를 재구성하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포착되고, 그런 추세가 한국에게 결코 유리한 국면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분히 시의적(時宜的)이고 정책지시적 성격을 갖는다.

신 외교 독트린인 동북아 균형자 역할을 추진함에 있어 한국은 한반도 및 동북아의 핵심적인 현안들에서 러시아의 국익과 상당부문 상호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참여정부의 전략적 선택 여하에 따라 러시아의 지지를 확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동북아 균형자론 구상은 미․중․러․일로 대표되는 역내 4강의 이해관계가 민감하게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사안이기에 이들의 역학관계를 신중하게 고려하는, 말 그대로 균형 잡힌 접근을 요한다. 동북아가 여전히 제로섬 게임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참여정부의 고민이고, 동북아 균형자론의 추동력을 약화시키는 최대의 걸림돌이다.

넓게는 한반도와 동북아를 둘러싼 미․중․러․일의 경쟁구도 속에서, 좁게는 한미 동맹체제 속에서 한국이 과연 어느 수준까지 러시아와 전략적 협력을 해나갈 수 있고 해나가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 동안 국내 정계 및 학계 일각에서 상호 추구하는 국익구조의 상합성에 착목하여 러시아와의 전략적 협력 필요성에 대한 많은 논의와 방안들이 제시되어 왔지만, 현실에서 한국은 러시아를 전략적 파트너로서 잘 활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끊임없이 러시아와의 전략적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러관계가 전략적 계획 위에서 수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한반도 및 동북아에서 추구하는 다양한 한국의 국가이익이 한․미동맹 틀 속에서, 서울이 만족할 정도로 옹호되고 증진된다면 한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협력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한국의 국가발전 전략과 관련된 핵심적인 국가이익이 한․미 동맹 틀 속에서 지켜지고 증진되는데, 왜 러시아와의 전략적 협력을 운위할 필요가 있겠는가.

최근의 독도문제에 대한 미국의 일본 경사 태도 그리고 북핵문제, 주한 미군의 역외 역할 확대 등에서 관찰할 수 있듯이, 한미간 이견과 국익 충돌 현상이 점차 심화되어 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즉 한․미동맹이 당분간 한국의 안보와 한반도의 평화에 핵심적인 것으로 남아 있겠지만, 한국의 국가이익이 이 틀 속에서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러시아를 바라보는 전략적 시각과 협력 필요성이 태동된다고 하겠다.

한국이 한미동맹을 경직되게 수용하고 그 틀 속에서만 움직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으로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 및 일본과도 전략적인 ‘관계 맺기’를 이루기 어렵다. 한․미동맹의 위계적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관계 양상을 유연하게 해석하고 능동적으로 조정하는 창조성 위에서 주변 4강과의 ‘전략적 관계 맺기’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참여정부가 지향하는 동북아 균형자론의 참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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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한국외대 러시아학과 교수이다.
* 이 글은, 아시아 사회과학 연구원이 4월 29일 개최한 ‘동북아 균형자론’ 관련 토론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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