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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왜곡, 비판할 수 있는가

이재봉 기자 (기사입력: 2005/05/14 19:20)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분노가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폭발하고 있다. 조선이나 중국과 관련된 일본 역사 왜곡의 핵심은 한 마디로 동아시아에 '진출'한 것이지 '침략'한 게 아니라는 점인데, 우리가 이를 떳떳하게 비판할 수 있는지 의심이 생긴다.

대개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또는 '우리편'의 시각에 따라 쓰여진다. 따라서 침략이 정당하게 서술되거나 아름답게 묘사되기 쉽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이 '서부 개척'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 속에는 흔히 '인디언'이라 불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엄청난 약탈과 학살이 있었다.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여 거기에 살고 있던 수백만 내지 수천만 원주민들을 약탈하고 학살하면서 거의 멸종에 이르도록 한 게 '서부 개척'이라는 것 아닌가. 따라서 승자의 시각에 따르면 '개척'일 수 있지만, 패자의 처지에서는 '약탈과 학살'이다.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위 조선 선각자들의 표현대로 '황인종의 맹주'였던 일본인들이 '열등한 인종' 또는 '미개인'들의 조선이나 만주에 들어와 철길도 깔고 공장도 세우고 했으니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측면도 있다. 그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탈과 처형이 있었지만. 따라서 승자의 시각에 따르면 '개척'일 수 있고, 패자의 처지에서는 '침략과 착취'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우리가 패자의 시각으로 아시아에서 일본이 진출한 게 아니라 조선을 침략했다고 주장하려면, 바다 건너 아메리카에서는 미국이 서부 개척을 한 게 아니라 원주민들을 학살했다고 써야 하지 않을까. 또는 우리가 승자의 시각을 따라 미국의 '서부 개척'이라는 서술을 받아들인다면, 일본의 '동아시아 진출'이라는 주장도 용인해야 하지 않을까. 아메리카로부터는 승자의 시각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면서 아시아에서는 패자의 처지를 내세우는 게 과연 정당하고 떳떳한지 생각해보자.

베트남 전쟁과 한국 파병에 관한 역사 왜곡

그런데 일본의 역사 왜곡 못지 않게 심각한 우리의 역사 왜곡이 있다. 어제 4월 30일로 끝난 지 30년이 되는 베트남 전쟁에 관해서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내의 양심 세력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거의 온 세계가 크게 저항했던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 전쟁이었다. 우리는 처음엔 미국에 간청하다시피 해서 그리고 나중엔 미국의 줄기찬 요구와 은근한 압력에 따라 '미국의 용병'으로 참전했다.

다른 우방국들은 미국의 요구에 마지못해 베트남 땅에 깃발만 꼽아놓은 꼴이었지만, 한국은 베트남 파병을 자청하고 나섰으니 용병이라기보다는 침략자였다.

실제로 박정희는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꼭 6개월 뒤인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에게 한국군을 베트남 전쟁에 보내고 싶다고 몇 차례 간청하다시피 제안하자, 케네디는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고 대꾸했다. 1963년 케네디가 죽자 1964년 초 박정권이 다시 베트남 파병 의사를 전했지만, 죤슨 행정부는 한일 국교 정상화 추진에 지장을 초래할까봐 조심스러워 했다. 박정권이 베트남 정부와 직접 접촉을 시작하자, 미국은 1964년 5월 처음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파병을 요청했다. 6월 한국이 의료 지원단과 태권도 교관들을 보내기로 미국과 합의했는데, 박정권은 여전히 전투 부대까지 보내고 싶다고 간청하면서, 9월 130명의 의료 지원단과 10명의 태권도 교관들을 1차로 베트남에 보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1965년부터 끊임없이 한국의 파병을 요구하게 되는데, 미국이 한국을 얼마나 염치없이 몰아붙였으면 1966년 2월 브라운 주한 미국 대사가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항의하다시피 했겠는가.
"우리는 한국에 소수의 의료 지원단을 요구해서 수백명을 지원받았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큰 비전투 부대를 요청해서 2,000명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전투 사단을 요구해서 20,000명을 지원받았다. 잠시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더 많은 여단과 사단을 요청했는데, 약 30,000명을 지원받을 것 같다. 이제 한국인들이 이에 대한 결정을 굳힐 시간조차 주지 않고 그들에게 10,000명을 더 보내달라고 요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언제 끝날 것인가.... 이렇게 되면 약 60,000명의 한국군들이 베트남에 머무르게 되는데, 한국을 빼고는 실질적으로 유일한 참전국인 우리 미국보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2-3배 더 많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베트남 전쟁과 한국 파병에 관해 어떻게 왜곡해왔는지 몇 가지 사례만 든다. 첫째, 전쟁이 끝난지 10년 뒤인 1985년과 1988년 소설가 황석영이 {무기의 그늘}이란 소설을 펴냈다. 베트남의 암시장에 초점을 맞추어 미국의 경제 침략 및 부패를 그린 내용으로, 참전 용사였던 황석영이 이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1975년이었다. 두 권짜리 소설이 책으로 출판되는데 10여년이 걸린 것은 정부의 탄압으로 두 차례나 연재가 중단되었기 때문인데, 역사가 아닌 소설로도 베트남 전쟁에 관해 제대로 얘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베트남 전쟁이 끝난지 20년이 지난 1995년 5월 김숙희 교육부장관이 국방대학원에 초청받아 강연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용병으로 참여했던 전쟁"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에 군인들이 반발하자 목이 잘리고 말았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 독재 시절이 아닌 이른바 '문민 정부'의 김영삼 대통령이 "도저히 용납못할 일"이라며 장관 자리에서 쫓아내버린 것이다. '용병 (傭兵)'이란 '남의 나라 전쟁에 돈을 받고 나가는 병사'라는 뜻인데, 1960년대 한국군은 장군이든 사병이든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미국으로부터 월급을 포함한 각종 지원을 받고 참전했다. 용병을 용병이라고 용기 있게 진실을 밝힌 것이 장관 해임의 사유였던 것이다.

셋째, '국민의 정부'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12월 베트남을 방문하여 "양국간의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데 이어, 1999년 8월엔 베트남 국가원수와 청와대에서 정상 회담을 하며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사과했다. 이에 참전했던 군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나라당과 조선일보 등에서는 온갖 비난과 항의를 퍼부었는데, 그들의 억지 몇 가지만 소개한다. "우리는 분명 민주 수호를 위한 정의의 십자군이었다.... 월남 전쟁은 자유 세계 모든 국민들을 위해서 싸운 자유 수호 전쟁이었음이 분명하다.... 일부 좌경 세력들이 제기하고 있는 용병이니 양민 학살이니 하는 주장들이 더욱 힘을 얻어 기승을 부릴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특히 그 때 한나라당 권철현 대변인은 "김대통령의 주장은 '미국 용병으로의 월남 참전'이라는 운동권 주사파의 논리와 흡사하다"고 했고,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부총재는 "대통령의 역사 인식에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고 참전 용사들의 명예를 이토록 손상시켜도 되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대한민국의 명예에 못을 박는 것과 같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당시 파병 대가로 돈을 제공했던 미국 정부는 한국군을 '용병 (mercenary)'으로 간주하고 그렇게 서술했으니, 위에 소개한 사람들은 역사 왜곡을 넘어 자신들이 신주 모시듯 상전으로 떠받드는 미국 정부조차 졸지에 "일부 좌경 세력" 또는 "운동권 주사파"로 만들어버린 꼴이 아닌가. 1945년 한반도에 38선을 긋고 남한에 들어왔던 미군들은 자신들을 분명히 '점령군'이라고 밝혔는데도, 우리는 아직까지 '해방군'으로 부르면서 '점령군'이라고 표현하면 반미 용공 이적 행위로 몰아붙이는 짓과 비슷한 것이다.

김일성의 독립 운동과 박정희의 친일 행위에 관한 역사 왜곡

이게 거의 6년 전에 있었던 역사 왜곡이라 실감나지 않는다면 바로 지난달 있었던 역사 왜곡 사례 한 토막 소개한다. 4월 11일 강만길 광복 6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장이 "김일성 전 주석의 항일 빨치산 운동도 독립 운동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 데 대해, 한나라당 부대변인은 "김일성이 항일 운동가라면 국립 묘지에라도 모실 것인가? 김일성을 항일 운동가로 인정하는 강만길 위원장의 발언은 공인으로서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발언"이라며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질세라 자민련 김학원 대표는 "한국 전쟁을 일으켜 수 백만명의 동족을 학살한 사람을 독립 운동가로 추앙하면서 떠받들어야 한다는 강위원장의 주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김일성이 1920년대 중학교 다닐 때부터 항일 운동에 나서 1930년대 만주 벌판에서 목숨을 내걸고 항일 무장 독립 운동을 벌인 사실과 '국립 묘지에 모시는 일' 또는 '한국 전쟁을 일으켜 수 백만명을 죽게 한 일'은 별개다. 독립 운동을 했기 때문에 국립 묘지에 모시자는 것도 아니고 한국 전쟁의 책임을 묻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전쟁의 책임 때문에 과거의 독립 운동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폄하해서도 안된다. 바로 '가짜 김일성'이란 주장이 얼마나 심각한 역사 왜곡인가. 우리가 그를 주관적으로 '위대한 수령'으로 평가하든 '전범'과 '독재자'로 평가하든, 그가 독립 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치열하게 항일 운동을 벌인 것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와 비슷하게 박정희에 대한 사실이나 평가도 제대로 짚어봐야 한다. 그는 일제가 '황국신민' 정신이 투철한 교사로 양성하기 위해 세운 사범학교를 1937년 마치고 교사가 되었다가, 1940년 일제의 괴뢰 정부 만주국의 군관학교에 들어가 수석으로 졸업한 뒤, 1942년 일본 육사로 편입하여 1944년 '황군 육군 소위'가 되어 만주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1946년 패잔병 신세로 귀국했는데, 공산주의자였던 형이 1946년 피살된 데 이어, 그는 1948년 남로당 가입 등 죄익 혐의로 체포되어, 1949년 군사 법정에서 사형 구형에 '무기 징역, 파면, 급료 몰수'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가 관계했던 좌익 조직망을 폭로하여 수사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육군 정보국에서 월급도 없이 문관으로 일하다 1950년 6.25가 터지자 현역에 복귀하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김일성이 박정희를 살려준 셈이랄까.

그리고 그가 1961년 쿠데타를 일으키고 18년 동안 군사 독재를 펴오면서 경제 성장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다른 가치관과 시각에 따라 그를 '군사 독재자'로 깎아내릴 수도 있고 '역대 최고의 대통령'으로 치켜세울 수도 있다. 아울러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가 해방 이전엔 일본군 장교로 친일 행위를 벌였고 해방 이후엔 공산주의 운동에 몸담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를 '역대 최고의 대통령'으로 치켜세우고 그의 딸이 집권하는 데 지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의 과거를 덮거나 부정하려 한다면 심각한 역사 왜곡 아닌가.

우리의 역사 왜곡은 반성하지 않은 채 일본의 역사 왜곡에 핏대를 세우는 게 정당한지 거듭해서 생각해보자. 나아가 일본의 역사 왜곡에는 그토록 분노하면서 우리 자신의 역사 왜곡을 밝히려는 '과거사법 제정' 문제는 국회에서 왜 저렇게도 헝클어지고 일그러지는지 따져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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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원광대 교수이다.
* {남이랑 북이랑}(2005년 5월호}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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