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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반세기만에 되돌아보는 오월 광주

그날 나는 부끄럽게도 잠시 고향을 배반했었다

윤영전 기자 (기사입력: 2005/05/24 21:46)  

오늘은 5.18민주화항쟁 25주년 기념일이다. 광주 5.18 국립묘지에서 25주년 기념식과 함께 서울에서도 종묘공원에서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와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2천년부터 개최한 서울행사에 나는 참석하여 5월광주의 민주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일년 중, 제일 아름다운 계절, 오월 광주의 25년 전, 그날을 되돌아본다. 80년의 서울의 봄은 비록 신군부의 12.12의 군 반란이 있었지만 민주화의 물결을 감히 그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의문을 갖지 않은 채, 온 국민이 희망의 봄을 기다렸었다.

그러기에 봄은 서울은 물론 빛고을 광주에서도 오는 듯 했다. 그러나 심상치 않은 군부의 동정은 5월16일 이화여대에서 개최하고 있던 전국학생대표자를 검거하면서 5.17비상계엄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내리고 있었다. 시민들은 평화적으로, 유신이후 15년 만에 국민의 직접선거로 군사독재와 유신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정부를 세우려 열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엄령에 의해 전국 주요 공공기관에 탱크와 계엄군이 진주하였다. 특히 계엄군은 유독 광주에 특전사령부 공수여단을 배치했다. 신군부는 이미 김대중 내란음모조작사건을 완료하고 광주를 공략했다. 5.18 그날 오전,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전남대학생들의 산발적인 비상계엄 철회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계엄군은 즉각적으로 전남대학교 정문에 출동하여 총칼로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림동과 금남로, 그리고 시내로 질주했다. 계엄군은 데모대의 시내 진출을 막느라 탱크까지 동원되었다. 여기에 시민들이 가세하여 시위대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그날의 시민들과 학생들은 감히 총칼 앞에 후퇴는 없었다.

나는 광주의 이교필이라는 친구(지금은 고인이 되었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광주는 지금 살기의 계엄군에 의해 시민들과 학생들, 심지어는 임신부와 여학생들까지 대검으로 찌르고 총탄을 발사하고 있다면서, 세상에 이런 일이 어찌 일어났느냐며 울먹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광주를 제외한 서울과 각 도시에서는 군인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앞에 꼼짝도 못하고 감시와 검문을 당하고 있었다. 나도 서울대학교에 출근을 하는데 계엄군의 제지에 항의를 했더니 엎드려 받쳐 기압을 주었다. 중년의 나이로 월남전까지 다녀온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예비군 장교출신인 교수들도 총칼 앞에 꼼짝없이 그들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5.16때도 12.12때도 허망했던 그때의 심정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순간이었다.

오후가 되니 검열을 받은 중앙지들이 대문짝만한 활자로 “전국비상계엄 선포, 광주에 폭도들이 시위로 강경진압 중” 이라는 보도에 아연 실색했다. 특히 광주폭도시위는 김대중 내란음모자들이 정부전복을 기도해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폭력시위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이 기사에 일반시민들과 교직원들 사이에도 이견이 속출했다. “전라도 광주 놈들이, 김대중이를 앞세워 정부전복 음모를 꾸몄다”며 분개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그들을 향해 “그 신문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계엄당국에서 조작되었다”고 했더니 그들은 나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은 나에게 “너 전라도 놈이지! 그래서 두둔한거지?” 하기에 나는 순간 “나는 충청도가 고향이다. 그러나 전라도 사람을 함부로 욕하면 안 된다” 하니 사실은 자기 집 셋방에 사는 전라도 사람과 대판 싸우고 나왔다며, 미안하다고 했지만 편견이 심했다.

나는 순간, 그들이 전라도라는 물음에 어찌하여 충청도라고 대답했는지 의문이었고 참으로 부끄러웠다. 나는 왜, 내 고향 빛고을 광주를 부정했는가? 마음이 몹시도 괴로웠다. 그러나 그들이 계엄하의 신문과 방송만 보고 전라도가 마치 공산집단폭도인양 살벌한 살기마저 띄고 있었기에 임기응변으로 거짓말을 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내가 평생 지역감정에 관해서는 물불을 못 가리는 자신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만약 그들과 정면충돌을 했다면 아마 살인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고향방언을 쓰지 않고 주로 서울말이었다. 그랬기에 그도 내가 전라도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을 것이다. 참는 자가 이기는 자가 아니라 순간을 바꿔본 분위기 전환이었지만 나는 평생을 두고 후회한 일이었다. 특히 무조건 애향심이 강한 사람들이 안다면 나는 그들에게 몰매를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날 친구에게 걸려온 마지막 전화는 “나는 지금 시민군에게서 총 한자를 받아 실탄을 장진하고 있다. 언제 계엄군이 데모대원들 체포명목으로 우리 집에 쳐들어온다면 나는 그들을 쏠 수밖에 없다”는 긴박한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총을 함부로 쏘면 안 된다. 신중하게 처신해라. 정당방위가 된다면 모를까?” 하면서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한 광주의 현장을 생각했다. 뉴스와 신문은 계속적으로 김대중 일당이 정동년 전남대학 복학생을 사주하여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외 보도는 사실을 왜곡하여 보도했지만 서독을 비롯한 유럽 언론은 광주시민들의 정당한 항의라고 보도하고 군부의 무리한 학생시위대 진압이 원인이라는 분석기사까지 쓰고 있었다. 외국의 보도는 친척이나 친구들이 해외에 나가있는 광주를 걱정하는 뜻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친구의 통신이 두절되어 정확한 현지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답답하고 괴로운 나날이었다.

내 고향 광주에서 일어난 불행한 당시의 광주사태는 나를 비롯한 뜻있는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한없이 슬픔만을 안겨주었다. 나는 그때 광주의 비참한 소식을 들으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광주의 계엄군들이 무자비한 학살행위가 용서되지 않았다. 참다못해 나는 신부에게 고백성사를 청했다.

“나는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 사태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전방에서 나라를 쳐들어온 적군을 물리쳐야 할 우리 대한민국 국군이 어찌하여 부모나 형제자매 학생들을 총칼로 탱크로 학살을 한단 말입니까? 학생과 시민들은 아무 죄도 없이 평화적으로 데모와 시위를 했고 항의한 것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럴 때 어찌하십니까?” 나는 흐느끼면서 고백을 계속했다. “주님은 평화를 주러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신부님은 아주 나지막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답하고 보속을 주었다.

“형제님이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은 형제님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의 고통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러한 고통을 받을 때마다 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해야합니다. 우리 주님은 아무런 죄도 없이 그들이 만들어 놓은 ‘유다의 왕’이라고 했다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광주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신 죄 없는 형제자매들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듯이 그분들도 우리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선량한 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그들이 회개하도록 말입니다. 형제님 기도 많이 하십시오.”

신부님은 보속으로 ‘주기도문과 성모송과 사도신경을 3번씩 하고 남을 위해 착한 일을 한 가지라도 하라’는 보속을 주었다. 성당 안에는 성체가 모신 곳에만 불빛이 있었다. 약간 어두운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향에 엎드려 간구했다. 고백성사에서 얻은 나의 심중은 착잡했다. 인과응보라는 말도 있지만 주님의 용서와 사랑은 그게 아니었다. 우리 스스로 반성하고 용서를 하라는 것이었다. 약간의 원망도 있었지만 깊은 심연으로 신부님의 말씀이 참이었다.

다음날 우리 본당에서 주임신부는 강한 톤으로 광주의 계엄군 폭거를 비난했다. 그리고 언제고 그들은 하느님의 신판을 받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우리들 스스로 용서를 하라고 했다. 우리가 지금 광주의 형제자매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헌혈뿐이었다. 죽어간 사람도 많지만 부상자가 수천이기에 피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나는 선착순으로 헌혈을 자원했다. 밝혀지지 않은 광주의 소식이었다. 시민군들이 아세아 자동차를 앞세워 탱크를 물리쳤다는 사실은 보도되었다. 일종의 광주는 해방구였다. 광주를 장악한 시민들과 시민군들은 다음의 반격에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일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했다는 계엄군의 작전은 계엄군이 물러간 1주일 만에 반격을 가해왔다. 마치 외국에서 있었던 엔테베 작전처럼, 도청 마지막 사수대를 무참히 학살하고 도청과 광주를 장악했다. 광주가 무슨 백마고지도 아니고 전선도 아닌데 그들은 그런 전쟁놀이를 자국내 국민을 상대로 하고 있었다. 민족사에 오점을 남길 그런 치욕의 역사였다.

공수특전단의 계엄군이 1주일 만에 시민군이 사수한 도청과 광주시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시외통신망이 재개되었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야! 상의하려 전화했다. 지난번 시민군에서 총 한 자루를 받아서 만약을 몰라 반납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하면 좋으냐? 땅에다 묻을까, 아니면 개천에 버릴까?” 나는 서슴없이 반납하라고 했다. 친구는 여한이 두려워서 물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다음날 경찰에 반납을 했다고 했다.
항쟁기간 중에 수천 명이 희생되었다는 시민들의 발표와 정부발표는 차이가 많이 나고 있었다. 며칠 전 608명의 사망자와 부상 2천명이라고 발표를 했지만 광주에 관이 부족했다는 사실과 병원마다 가득한 중부상자들의 치료와 도청 앞 무덕관에 싸늘하게 죽어간 200여명의 광주의 시민들의 시체 앞에서 통곡의 소리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행불자를 포함한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죽음들이 많이 있다. 화장을 해버렸기에 신원파악이 제대로 되었는지 매장에 따른 발굴은 제대로 했는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광주오월의 참상이다.

광주는 동학농민혁명과 3.1절 그리고 광주학생의거와 4.19혁명과 부마항쟁에 이은 광주민주항쟁은, 분명 87년 6월 항쟁의 결과를 가져온 결과였다. 아직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5.18민주항쟁이지만 거룩한 시민들의 혁명으로 기록될 광주 오월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동안 법적으로 광주오월 항쟁을 정립하고 있지만 아직도 국민적으로 승화된 광주민주혁명이 아니다. 다시는 그 어떤 무력으로 총칼로 탱크로 시민들을 압살할 수 없다는 증거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아직도 광주항쟁의 뜻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국민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오늘처럼 그동안 서울에서 기념행사가 몇 해 동안 열리고 있지만 적어도 몇 만 명의 시민들이 함께해 광주의 숭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고 민주혁명을 승계하겠다는 다짐도 하는 그런 서울기념대회가 열려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5.18민주항쟁이 광주만의 것이라고 치부하는 국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답답함을 느낀다.

이제 우리는 올해로 분단 60년 환갑을 맞이했고 광주항쟁 25주년을 맞이하고 남북화해와 협력의 물꼬를 튼 역사적 6.15남북공동선언 5주년을 맞는 해이다. 그 어느 때보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힘을 합해야 하는 때이다. 휴전협정 57년의 세월은 전쟁이 잠시 중단한 상태이기에 빨리 평화협정으로 대체해야 한다. 북미관계의 어려움도 풀리고 계속되고 있는 남북대화의 알찬 열매로 한반도에 전쟁이 없는 평화의 기운이 넘치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5.18광주민주항쟁이 4반세기가 다 되도록 정확하게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광부시민의 성숙되고 고귀한 시민혁명의 뜻을 기리도록 다함께 노력 할 것을 다짐해 본다. 다시는 그러한 불행한 역사가 재발되지 않아야 된다고... 그날의 오월광주에서는 명예롭고 아름다운 일들이 많았다. 방화사건도 강도와 도난사건도 약탈도 없는 시민들의 성숙한 민주역량을 발휘한 것이다. 김밥을 싸 나르고 음료수를 전하고 함께하는 공동체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25년 전 광주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지난 자랑스러운 5월광주의 그날을 되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잠시 고향을 부정했던 그때를 떠올려 보곤 한다. 이기주의적인 지역편향이 아니었고 애향심의 고향을 부정한 것이 아니긴 하지만 씁쓸하다. 중후한 서석산 아래 자리한 빛고을인 나의 고향이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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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사)평화연대 전 집행위원장 ·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통일부의 통일교육위원이며 수필가 · 서예 초대작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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