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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교회 운동 소고(小考)

정상시 기자 (기사입력: 2005/06/28 01:11)  

초대교회는 민중교회였다. 초기 한국 교회도 민중적 교회였다. 특히 민족의 고난, 민중의 역사와 함께 교회도 온갖 고난을 겪었다. 함께 고난을 나누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1919년 3.1운동에서의 한국 교회의 역할은 민족과 민중의 고난 속에서 함께 했던 초기 한국교회의 모습을 잘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앙이 득세하면서 교회의 민족 민중적 전통은 후퇴하고 탈 역사적 대중화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특히 남북 분단과 6.25 전쟁의 상황 앞에서 한국교회는 분단을 넘어설 평화의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지 못했다. 친미 분단 세력의 지지기반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70-80년대 군사 독재 시대 기독교는 자본화, 권력화 되어갔고 민중성을 상실해 갔다. 그 가장 적나라한 모습이 1980년 광주민중항쟁 사건에서 드러났다. 민중교회운동은 초대교회와 한국교회의 풍부한 민중적 전통에 그 뿌리를 두면서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다시 민중의 고난 공동체이자 희망 공동체로 거듭나려는 몸부림이라 할 것이다.

1, 민중 교회 운동의 배경은 무엇이었나?

민중교회 운동은 민중성과 교회성과 운동성을 통전적으로 실현하려고 하였다. 초대교회가 그러했듯이 신음하는 민족 민중의 삶과 유리되지 않는 교회이고 싶었던 것이다. 무슨 민중교회 운동론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억울하게 죽고 감옥가고 해고되는 민중 현실이 먼저 있었다. 그러고 “민중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기뻐한”(히11:25) 예언자들이 있었다.

감옥과 민중현장에서 민중을 만났다. 함께 고난의 연대를 체험하였다. 성경을 새롭게 읽었고 성경에서 민중(오클로스)를 재발견하였다. 초대교회도 새롭게 조명되었다. 민중 신학이 나왔고 민중, 민족의 교회를 말하였다. 이미 1970년대에 민중적 교회의 단초들이 만들어졌다. 그 시점은 1970년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 이후 일 것이다.

그러나 민중교회가 운동으로서 성격을 가지고 대두된 것은 1980년대 이후 즉 광주민중항쟁 이후였던 것이다. 민중신학에 의해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지만 민중교회가 민중신학의 산물은 아니다. 하나님의 민중 계시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것이다. 어쨌든 민중교회는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될 민중성과 교회성을 다시 일치시키려고 한 것이다. 실천적 성과는 쉽지 않았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중의 고난의 흔적(스티그마)를 지닌 교회가 되려는 몸부림의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반론적으로 민중교회의 원형이 초대교회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여기서 민중교회라고 할 때는 1980년대를 전후해 한국에서 출현한 특정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민중 교회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민중교회는 왜 하필 이 땅의 특정한 시대에 출현했던가? 한마디로 1980 년대를 전후해 한국에서 민중교회가 출현된 것은 그럴만한 주, 객관적인 상황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는 두 세 가지만 언급하겠다.

일반적인 역사적 상황은 논외로 한다하더라도, 당시 제도권의 많은 교회가 민중의 외마디와 신음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사례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자살한 전 태일의 죽음에 대해 많은 제도교회가 관심조차 없었고 信者이었던 전태일의 장례식을 교회에서 치루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문전박대 당했던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자살한 자를 교회에서 장례식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또, 1980년 서울의 봄을 비상계엄으로 진압하고 그해 5월 광주민중항쟁을 피로 진압하고 새 독재자로 등장한 전두환 장군을 위해 교회 지도자들이 조찬기도회에서 축복의 말을 하며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 여호수와”에 비견하였던 데서도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객관적 상황은 민중신학을 비롯해서 70년대부터 민중사건을 증언하고 함께 하려는 기독교내의 새로운 물줄기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산업선교회 활동, 수도권 특수선교회 활동 등이 그 대표적인 例일 것이다. 민중교회는 한편으로는 이런 흐름을 止揚하는 측면이 있지만 한 편으로는 이들에 의해 배태되고 촉발되고, 훈련된 측면이 있었다. 그 동안 민중교회의 독자성이 강조된 나머지 이들과의 연관성이 다소 과소 평가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다음으로 이 같은 객관적 조건을 배경으로 하여 민중교회를 시작할 주체, 즉 사람들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것은 주로 청년 학생운동, 혹은 수도권 특수 선교 등을 통해 민중체험과 역사체험, 감옥 체험 등을 하였던 신학도 들이 집단적으로 생겨난 현실에서 확인될 수 있다. 또 기존 제도교회에 실망한, 일반 대학의 기독학생으로서 위의 역사체험이나 민족 민중의 고난에 앞서 동참한 예언자적 신앙의 지식인등의 영향에 힘입어, 신학도가 되고 새로운 교회에 대한 비젼을 구체화하게 된 경우들도 있었다.

이 점에서는 基長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진보적 교회의 배경이 많기도 했지만 서대문 기장 선교교육원의 위촉생 과정은 이들의 훈련의 장으로서 많은 기여를 하였다. 예장의 경우는 산업선교회를 통해 조직적 훈련을 통해 민중교회를 목회할 주체가 형성되었다. 감리교의 경우도 산업선교회 활동이 중요한 인적 배출의 배경이 되었다.

2, 민중교회 운동의 역사적 흐름은 어떠했는가?

1) 민중교회 태동기, 1970년대

4.19혁명이 60년대의 사회사적 기점이라면 1970 년대의 민중사적 뚜렷한 기점은 1970년 11월 13일의 전태일 분신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민중계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한 사건이었다. 예언자의 귀 있는 자, 예언자의 눈 있는 자는 그 계시를 듣고 보았던 것이다. 들판에서 죽임 당한 아벨의 비명소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교회가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치 못했다. 이런 막힌 상황에서 “돌멩이들”이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고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유동우 라는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수기를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라는 제목으로 “대화”誌에 연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현실을 자각하는 계기를 주었다.

민중의 저항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더욱 억압을 강화하였다. 이른바 유신시대가 그것이다. 민중의 저항은 더욱 조직화되었고 박해 속에 단련되어 갔다. 그러다가 민중의 저항력이 유신체제의 뚝방을 넘치게 된 사건이 부마(釜馬) 민중항쟁과 이를 계기로 한 10. 26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민중 계시 사건으로서 민중의 고난 현실이 먼저 있었고 그 계시에 응답한 교회가 하나둘 생겼다. N.C.C.를 중심으로 한 사회 참여적 교회의 응답이었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교회의 예언자적 역사참여 흐름이 민중교회의 중요한 태생 환경이었다고 할 것이다.

도시산업선교회(U.I.M) 활동, 수도권특수선교 위원회 활동, N.C.C. 인권위원회 활동이 그것이다. 기존 교회 중에는 서울제일교회, 창현교회, 한빛교회, 수도교회, 새문안교회, 동대문감리교회 등을 비롯한 서울과 지방의 여러 교회에서 대학부를 중심으로 많은 활동을 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들은 민중교회의 플랫폼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70 년대의 이런 역사적 흐름 속에서 새로운 교회에 대한 요구들이 있었고 그 때 여러 교회들이 세워졌다. 성남주민교회(이해학목사), 사랑방교회(이규상목사), 활빈교회(김진홍목사), 형제교회(김동완목사), 희망교회(정명기목사), 노동교회(성문밖교회/조지송목사), 실로암교회(청계천 뚝방교회/모갑경목사), 동월교회(허병섭목사), 광야교회(인천 백마교회/ 조화순목사) 등이었다. 민중교회의 선구적 교회들이었다. 수도권 특수선교 등의 직접적 활동과는 별개로 1977년에는 신명교회가 구로동에 세워졌다. 이들 중에는 없어진 교회도 있고 지금도 열심히 선교하는 교회도 있다. 물론 당시에는 명시적으로 ‘민중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새로운 소명을 듣고, 민중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반석 위에 세우는 교회(마16:18)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형태의 교회 외에, 민중의 증언을 듣고 박해를 고발하고 함께 기도하고 또 항의했던 기독교회관의 목요기도회를 중심으로 한 숱한 기도회, 억울함을 당한 이들과 함께 현장과 거리의 많은 기도회, 철거민들의 기도회, 해직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교회(한빛교회당에서 매주일 오후에 모였다).....

이들 무정형(無定型)의 교회는 사실 1970년대 민중 현장 속에 세워진 민중의 교회이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1980년 이후의 보다 꼴을 갖춘 교회를 형성하고 조직적이고 연대적 운동의 성격을 띤 민중교회와 성격상 구분될 수 있겠지만 이들을 배제한 민중교회 역사정리는 민중교회를 너무 좁은 틀 안에 가둔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 하면 민중교회는 시대에 따라 변하면서 원칙을 지켜나가는 교회이기 때문에 때를 따라 그 성격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또 앞으로 민중교회도 당연히 변해갈 것이고 또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절을 좇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2) 민중교회의 성장기, 1980년대

80년대의 사회사적 시대구분은 “광주민중항쟁”이 그 기점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민중교회는 80년대에 형성되었다. 어떻게 보면 1980 년대는 민중교회의 본격적인 대두가 한국교회사에 중요한 한 특징을 형성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986 년을 전후로 하여 교단내의 민중교회 조직들이 형성되고 1988년 7월에는 약 80개의 민중교회로 교단과 지역을 망라하여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이라는 연합조직을 형성했다. 1992년에는 한국민중교회 운동연합의 회원 교회가 115개로 조사되었으나 그 이후 수적 증가는 이루지지 않았다.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은 3개 교단(기장, 예장통합, 감리교) 조직과 12개 지역조직을 바탕으로 조직되어 90년대 초반까지 활발히 활동하다가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연합 활동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 민중교회 운동의 퇴조라고 단정 짓기보다 변화된 상황에 따른 선교 양식의 변화라 해야 할 것이다. 독재에 대한 저항이라는 정치적 거대 담론보다 민중의 삶의 자리에 뿌리 내리는 일이 더 시급하게 되었다.

또 선교 형태도 다양하게로 분화되어 분야별 연대활동으로 대치된 측면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 민중교회의 특징은 사회 운동적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도시산업선교회등 기구 중심의 운동을 지양(止揚)하고 교회적 형태 속에서 육화(肉化)시키려 했다는 점도 민중교회 운동의 한 특징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 한창 민중교회에서 관심을 모았던 主題들은 “전체운동의 부문 운동으로서의 민중교회”, “외피론”, “조건 활용론” 등이 있었고 차츰 “주체적 민중교회론” “민중교회의 운동성과 교회성”, “민중교회의 영성”등으로 옮겨져 갔다. 그것은 민중교회의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80년대 큰 흐름은 사회 운동적 민중교회이었고 민중교회 목회자들도 사회운동에 대한 지향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것은 부인치 못할 것이다. 시대적 응급에 상황에 대한 민중교회 나름의 고민이 담긴 대응방식이었다. 어쨌든 80년대라는 시대의 전장(戰場)에서 직접 전투병의 역할도 했지만 민중 교회 차원에서는 응급 진료소 같은 역할을 많이 했다고 할 수 있다. 참으로 많은 환자(?)들이 밀려왔다.

그 때 민중교회가 시행했던 프로그램은 다양했다. 노동상담소, 야학, 노동자 문화교실, 맞벌이 가정을 위한 탁아소, 청소년 공부방, 주말진료소, 노동법 강좌등 다양했으며, 이들 일상 프로그램 외에 각종 지원사업, 분신, 연행, 투옥 등을 당한 자들을 위한 대책 활동 등이었는데 이런 일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각 민중교회마다 실무자라고 불리는 활동가들이 아무런 급료도 받지 않고 교회에서 한 두명씩 포진 하고 있었던 것도 당시의 모습일 것이다. 어쨋든 민중의 절규와 신음과 진통에 민중교회도 정말 뒤지지 않는 열심으로 일했던 시기였다고 자부한다.

참고로 필자가 시무하던 안양 박달교회(안민교회)의 당시의 선교 사업을 보면, 안양 노동상담소, 주말 무료진료소, 노동자 문화교실로서의 기타교실, 영화교실, 야학 등이었다. 노동자 영화반의 경우만 해도, 20평 남짓한 공간에 100명 이상이 빼곡이 앉아 채플린의 영화 등을 관람하고 해설 등을 곁들이고 간혹 노래도 함께 하며 진행했었는데 공간이 좁아 배란더에까지 앉고, 신발은 바깥복도와 화장실에 포개어놓고 겨우 앉아 진행하기도 했다. 그 당시 어느 민중교회나 비슷하게 이렇게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음반법, 혹은 노동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민중교회 목회자도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중교회는 민중현장과의 相關性(relevance)에 치중하는 과정에서 교회로서의 正體性(identity)에 대한 고민이 점차 많아져 갔다. 그것은 週中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이지만 정작 주일 예배는 극히 제한적인 소수만 모이는 현실 속에서 목회자로서 당연히 갖게 되는 고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교회의 正體性을 다시 질문하였다. 민중교회의 신앙문제, 교육훈련문제, 민중교회의 예배론 등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민중교회의 영성회복, 교회성에 대한 새로운 강조 등의 흐름이 생겨나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90년 대 이르러 민중교회의 특징적 흐름으로 더 분명히 나타난다.

3) 민중교회의 조정기, 1990 년대

1990 년대는 민중교회에게는 전혀 새로운 시련기라고 할 수 있다. 없어진 민중교회도 적지 않다. 흔히 민중교회의 후퇴기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민중교회의 조정기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 우선 상황의 변화였다. 세계사적으로는 사회주의권의 몰락, 세계자본의 全一的 지배, 정보화 사회 등을 특징으로 하면서 국내적으로는 92년 소위 문민정부의 수립을 비롯한 정치 환경의 변화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정치권력의 횡포라는 모순보다 자본 특히 국제 금융자본의 지배가 전면에 등장하는 상황이다.

또 하나는 80년대의 혁명적 상황의 후유증과 민중교회의 자기성찰과 전망 모색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기 성찰이라 함은 80년대의 민중교회 운동이 그 시대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몸에 맞는 운동, 몸을 세우는 운동”에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자기 진단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신앙공동체를 착실히 세우며 거기에 맞는 운동을 하는데 본의 아니게 소홀했지 않았나 하는 성찰일 것이다.

90년대는 민중교회의 구조 조정기 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 운동도 단일 전선체적 형식은 퇴조하게 된다. 다양한 전문성과 생활 운동적 지향으로 변화되었다. 한마디로 분명 사회적 지형이 많이 변했다. 민중교회로서는 전장에서 갑자기 轉役하였지만 새로운 상황에서 살아갈 준비와 훈련 등이 부족한 군인과 같은 상황이라고 비유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민중교회는 몸으로 때우고 뛰면서 새로운 환경 속에서 다양한 선교적 전문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몸으로 훈련된 잠재력이 있었다. 환경선교, 아동 청소년 선교, 노인 선교, 이주 노동자 선교, 광산촌 선교, 장애우 선교, 여성 선교 등의 선교 전문 인력의 다수가 민중교회 목회자들이나 민중교회에서 훈련된 사람들이다. 이러한 새로운 전문적 사회선교 영역을 구축해 가는 민중교회의 “선교적 전문화”가 있는 한편, 여전히 교회공동체를 민중적 삶의 자리 위에 세우려는 노력을 가장 중심에 놓고 헌신하는 경우도 많다.

민중교회 운동의 조직적 변화도 있었다. 기장 민중교회 운동연합은 1997년 “기장 생명선교연대”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예장 민중교회는 “일하는 예수회”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감리교의 경우 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민중교회의 교단 조직이 없어졌다. 지역단위 민중교회 조직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인천, 안양 지역 조직이 오랫동안 논의구조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대오가 많이 흐트러진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전선체적 연대조직이 후퇴하고 새로운 다양한 선교단위와 네트워크로 조정되는 과정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민중교회의 분화 발전기, 2000년대

2000년대의 민중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민중교회 조직적 연대는 약화되었으나 민중교회의 선교는 훨씬 활발해졌고 다양화, 전문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한편으로 민중의 일상적 삶 속에서 신앙 공동체로서 보다 깊이 뿌리를 내렸다. 물론 그 과정을 기성 교회화 라고 비판할 측면도 있지만 넓은 관점으로 볼 때, 민중교회의 다양한 발전과 뿌리내림의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교회는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린 교회, 그리고 다양한 선교사업을 활기차게 수행하는 교회로 서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독립적 복지법인이나 선교기관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회복지법인 들꽃 피는 마을”일 것이다. 그러면서 초기의 노동선교는 민중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대중적 노동자 조직으로 넘어갔다. 그 대신 민중교회의 선교는 노동자도 못되고 조직화되지 못한 이웃들과 함께 하는 선교로 발전했다. 다양한 복지선교의 영역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90년대부터 시작된 선교 다양화와 전문화가 가속화, 구체화, 정착화되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주 노동자 선교, 환경선교, 위기가정 아동선교, 청소년선교, 광산촌 선교, 노인선교, 장애우 선교, 여성 특수 선교(성폭력 예방센터, 기지촌 선교) 등으로 분화 발전되었다. 그러나 변치 않고 붙잡는 주제는 단순한 기구적 운동이 아니라 공동체적 뿌리를 갖는 선교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름은 다양하지만 이들 민중의 삶의 한복판에서 선교하는 공동체로서의 민중교회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세계적 차원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민중의 신음소리는 더 높아가고 있다. 자본화, 권력화 된 기성 교회에 대한 대안 교회, 새 교회로서의 민중교회는 여전히 의미와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3, 반성과 새로운 모색을 위한 메모

1980년대 한국사회는 질풍노도의 시대였고 진통하는 시대였다. 민중교회도 그 한복판에 질풍노도처럼 뛰고 달렸고 투쟁했다. 90년대는 시대 변화에 따른 조정기이면서 의미 있는 내부 진통과 내공을 쌓은 시기였다. 2000년대는 한편으로는 일부 신앙 공동체로 정착되기도 하지만 민중교회의 특징적 면모는 다양한 선교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기구적 성격을 넘어 사람을 모으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선교 공동체를 형성해 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쨋든 선교 전문화, 다양화로서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 다양화, 지역화라는 이면에 분산화인 측면을 어떻게 새로운 연대의 틀로 세워나갈 것인가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새로운 차원에서 함께할 거대담론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까지 민중교회라는 공통의 바탕은 여전히 살아있고 유효하다. 2000년대는 더 이상 민중교회가 필요 없는 시대가 아니라 민중교회가 더 절실한 시대인 것이다. 단지 좋은 그릇으로서 민중교회로 거듭나야 할 뿐이다. 정치권력보다 시장의 권력, 자본의 권력이 민중들에 대한 횡포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정치 권력의 억압에 대한 저항적 논리 속에 시작된 민중교회가 이제 자본의 권력에 고통당하는 민중들에게 희망과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결국 민중교회라는 슬로간이 약화되어도 민중교회의 내용적 실천은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즉 민중의 삶에 더 확고하게 뿌리를 내려야 할 것이다. 민중교회는 민중의 저항과 고난이라는 측면만이 아니라 민중의 삶에 생명과 풍성을 불어넣는 교회로 변해야 한다. 그 변화의 내용은 “민중교회를 넘어서는 민중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성의 바탕 위에서 전문성과 실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민중교회의 모습은 신앙적 생활 공동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나눔 공동체, 선교 공동체로 뿌리 내려야 할 것이다.(2005.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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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안민교회의 목사이다.
* 이 글은, 6월 27일에 열린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의 제82회 포럼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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