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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병제의 역사와 신화 (4)

징병제에 관해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면?

최재희 기자 (기사입력: 2005/07/28 01:18)  

흥미로운 상상을 해보자. 만일 징병제 폐지를 둘러싸고 국민투표를 실시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까? 과거에 합법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권력을 잡은 이들은, 쉽게 말해 쿠데타와 같은 방식으로 집권한 독재자들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이용했다. 코르시카 출신의 촌뜨기 나폴레옹은 10년 통령이 되고, 종신통령을 거쳐 황제가 될 때마다 국민투표를 동원했다. 자신의 집권이 국민의 뜻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나폴레옹 이후의 수많은 독재자들처럼 우리나라의 독재자들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었다. 이와는 달리, 현직 대통령이 자신의 진퇴를 걸고 국민투표를 제안하기도 했고, 며칠 전 제주도에서 행정조직 개편에 관한 주민투표가 있기도 했다. 하여간 실시 가능성 여부와 그 결과와 상관없이, 국민 대다수의 삶과 직결되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 국민들의 뜻을 직접적으로 묻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징병제에 관해 국민투표를 실시한 역사적 경험이 있었다. 바로 1차 대전 당시 호주에서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 국민투표가 그것이다. 오늘은 그 사례를 소개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호주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출신 백인 이민자의 나라였다. 1901년에 정식으로 호주연방을 수립하면서 자치를 허용 받았다. 연방 상원과 하원이 있었으며, 각 주별로 별도의 주 의회가 설립되어 있었다. 호주는 이처럼 영국식 의회 제도를 실정에 맞게끔 준용하면서 민주주의 국가로 착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이때 1차 대전이 발발한다. 1914년 8월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미국을 제외한 거의 전 세계가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대영제국의 일원이며 같은 민족으로 구성된 호주가 영국을 지원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소수의 전쟁반대 시위가 있었지만, 모든 정당과 노동조합, 사회단체는 모국을 위해 참전할 것을 결의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원하기 위해 모병소로 몰려들었다. 애국심에 불타는 젊은이도 있었고, 객기와 용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나, 단순히 권태에서 벗어나기를 원한 사람 등 다양한 동기를 가진 이들이 지원했다. 호주의 모병소와 훈련소는 밀려드는 지원병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1915년 1월에만 5만2천 명이 등록했다. 이 전쟁이 4년 이상 지속되는 참혹한 총력전, 소모전이 되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호주의 젊은이들은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전쟁이 끝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이들의 마음은 이미 유럽전선에 있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전쟁의 실상은 상상과 달랐다. 1915년 4월 영국군과 함께 터키의 갈리폴리에 상륙한 호주군은 전사자 1만500여명, 부상자 2만 4천여 명의 참담한 패배를 경험해야 했다. 전황은 고착되었고 희생자의 수만 늘어났다. 실업은 증가했고 물가는 뛰어올랐다. 전쟁의 참혹함에 관한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고, 1915년 중순부터는 부상자들이 고향으로 후송되기 시작했다. 지원병의 수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지원병의 수가 적은 빅토리아 주를 중심으로 무차별적인 선전 작업 등 특별 모병운동이 전개되었다. 지원하지 않은 젊은이는 ‘기피자(shirker)’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직간접적인 입대 압력에 시달리게 되었다. 전쟁의 광기는 더욱 강해졌다. 독일소시지는 데번소시지로 개명되었으며, 독일 출신 이민자는 해고되거나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정부는 징병제 법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당시 노동당 출신의 휴스(W. M. Hughes)가 정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호전적인 그의 연설문을 작성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훗날 언론제국을 이룬 머독(K. Murdoch)이었다. 야당인 자유당은 당연히 징병을 지지했다. 그는 일부 노동당원의 징병 반대를 무마시키고, 징병의 원활한 실시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징병제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결정했다.

1916년 10월 28일에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당신은 이 위급한 시기에 전쟁기간 동안 정부가 해외에서의 군사복무를 요구할 권리를 가지는 것에 찬성하는가?”에 대한 찬반투표에서 놀랍게도 찬성 1,087,557표, 반대 1,160,037표라는 결과가 나왔다. 징병제법안은 7만여 표의 차이로 부결되었다. 이어 1916년 11월 14일 개최된 노동당전당대회에서 수상의 불신임안이 제출되었다. 휴스는 자파의원들을 데리고 탈당해 자유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의회가 해산되고 새로이 실시된 총선거에서 연립정부가 압승을 거두었다. 선거 전 상원의 과반수에서 4석이 모자라던 것에서 16석이 추가되었고, 하원의원도 8명이 증가했다. 다시 한 번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호주인은 징병은 반대하지만 정부의 전쟁 수행은 지지했던 것이다.

선거 결과에 고무된 휴스는 다시 징병제법안을 국민투표에 상정했다. 1917년 12월20일에 2차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찬성 1,015,159표 대 반대 1,181,747표로 징병제안은 다시 부결되었다. 오히려 격차(166,558표)는 두 배로 커졌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귀환병사의 일부가 반전, 반 징병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귀환병사 징병반대동맹(Returned Soldiers' Non-Conscription League of Australia)을 중심으로 징병반대운동을 전개해 국민투표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전체 병사들의 투표결과도 찬성 103,789표 대 반대 93,910표로 그 차이는 미미했다. 전쟁을 경험했거나 경험 중인 사람들은 전쟁의 참상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징병을 통해 국민들을 이러한 전쟁의 참상에 강제로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당시 호주의 징병 반대파는 일부 노동조합원, 일반 노동당원, 각주의 노동당정부,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인구의 21%가 가톨릭), 소수의 비영국계 이민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와 평화주의자를 제외하고 이들이 전쟁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반대파에 따르면, 1차 대전은 ‘군국주의 대 민주주의의 전쟁’이었다. 무엇보다 이 전쟁은 국가의 독재에 대항해 개인의 생명과 양심의 자유를 수호하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징병제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군국주의자의 음모에 불과했다. 따라서 해외에서와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군국주의와 싸우는 것은 중요하다고 이들은 주장한 것이다. 독일과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가 징병에 반대한 것은 당연했다. 이들은 군국주의의 독재와 식민 지배를 피해 자유를 찾아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이상과 같이 호주에서 실시되었던 두 차례의 징병제 국민투표의 부결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는 세계대전이라는 슬픔과 증오의 세상에 희망의 징후를 보여준 한줄기 빛으로 칭송되었다. 호주 사람들은 현대 민주주의에서 시도된 적 없던 민주적 실험에서 중요한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이들은 국민투표라는 민주주의를 통해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수호했다. 개인의 양심이나 의지에 반해 인간의 생명을 희생하고 살육하도록 강요하는 징병제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반한다는 것이 1차 대전 당시 호주의 결론이었다.

결국 호주에는 징병제가 실시되지 못했다. 영국을 필두로 미국과 캐나다, 뉴질랜드 등이 모두 1차 대전 동안 징병제를 경험했지만, 호주는 스스로의 힘으로 징병을 거부한 것이다. 그렇지만 전쟁의 피해는 엄청났다. 1차 대전 동안 약 41만 명의 호주 시민이 자원입대했다. 이것은 18-45세 사이의 호주 남성 중 약 40%에 달하는 수치였다. 이 중에서 약 33만 명이 직접 전투를 경험했고, 6만 여명이 사망했다. 부상자는 16만 명 정도였다.

열거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군대 내의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아까운 젊은 목숨이 오늘도 희생되고 있다. 당국은 이들이 군 생활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늘어놓는다. 군대가 어디 캠핑 가는 것인가? 2년 간 사고치지 않고, 사고 당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면 끝인가? 다시 반복하지만, 징병제는 전쟁을 위한 도구이다. 무엇을 위해 남을 죽이고 죽어야 하는가? 나와 총부리를 겨눌 적 병사는 또 누구인가? 1차 대전이 끝난 후 모든 사람이 평화를 갈망했다. 그러나 베르사유조약은 전쟁의 진정한 원인이 제국주의와 식민지 쟁탈전에 있었음을 부인하고, 모든 책임을 패전국인 독일에 돌렸다. 총성은 멈췄지만, 진정한 평화는 요원한 것이었다. 당시 평화운동 진영은 각국이 징병제를 폐지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어떤 정부도 이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20여 년 후 2차 대전이라는 더 큰 비극이 이어졌다.

1세기에 걸친 징병제의 역사를 되돌아보자. 만일 세상에 징병제란 제도가 없었다면,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 대전(Great War)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징병제가 인간사회에 도대체 어떤 역할을 했는가? 우리는 징병제를 폐지하기 위해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 민주주의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호주의 역사적 경험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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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고려대 일본학 연구센터의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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