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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촛불 하나

관리자 (기사입력: 2005/10/19 22:28)  

촛불 하나를 생각할 때, 지난 8월에 있었던 두 일을 머리 속에 떠올린다. 하나는 2005년 8월 6일 자신이 설립하고 60년간 이끌어온 떼제(Taize') 공동체에서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기도회를 가지던 중 한 여인의 칼에 찔려 사망하게 된 로저 슛츠(Roger Schutz-Marsauche)요, 다른 하나는 비슷한 시기에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택사스 농장 앞에서 그를 만나기를 기다린 신디 쉐한(Cindy Sheehan) 부인이다.

1) 로저 슛츠는 스위스에서 1915년 스위스인 개혁개회의 목사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25세가 되던 1940년에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프랑스로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는 이웃사랑과 평화와 화해를 모든 종교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찾아서 헤맸다.

자전거 여행을 통하여 공동으로 기도하며 찾아오는 손님들을 친절과 기쁨으로 맞이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집을 찾았다. 그가 찾던 곳이 바로 Burgund 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 떼제였다. 그곳에서 그는 같이 살 사람들을 찾았고, 나치가 극성을 부릴 때는 쫓기는 유대인을 숨겨주기도 하여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47년에 일곱 명이 공동생활할 것을 결의하고 공동체를 만들었다. 모든 사람을 하나같이 사랑하는 공동체, 결혼하지 않은 남성공동체로서 단순하게 살되 노동과 기도를 핵심으로 하였다. 남이 주는 돈을 받지 않고, 자기들 스스로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먹고 사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 특별히 청소년들을 좋아하였다. 아마도 어른들에 대한 교육에서 희망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주 조용하면서도 은근하게 떼제의 사랑과 평화의 빛은 전 세계에 퍼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계에 알려졌다. 특히 매년 있었던 청소년 캠프는 매우 유명하였다. 떼제공동체를 다녀간 청소년들은 몇 십만 명이 될 것이다. 그곳을 방문하였던 사람들 중 많은 수는 그들의 단순한 생활과 평화롭고 사랑스런 생활과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가슴 깊이 파고들어 피곤한 영혼을 만지는 노래를 통하여 각자 자기 속에 이미 간직하였던 촛불 하나씩을 당기고 갔을 것이다. 거대한 종교조직의 권력체계에 버릇된 사람들에게, 교리가 주는 문자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그들의 삶은 참 삶, 진리를 따라서 사는 삶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었을 것이다.

떼제의 삶의 핵심과 비밀은 공동생활이다. 혼자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삶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어떤 전체주의나 독재체제에서 사는 것 같은, 외부의 명령이나 억압에 의한 강제공동체가 아니라, 자기 속에서 나오는 자기확신에 따른 자율과 자발성을 핵심으로 하는 공동생활이다. 떼제가 주장하는 것은 비폭력 평화로운 삶이다. 물론 로저 슛츠가 폭력에 의하여 암살된 것은 매우 모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폭력 평화를 숭상하고 주장하며 살아간다고 하여 폭력 밖에 사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그들 자신은 스스로 비폭력과 평화를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로저 슛츠를 보내는 장례예배에서 떼제의 형제들은 그를 칼로 찔러 죽게 한 여인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녀에게 과한 판결이 내려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동시에 ‘그녀를 용서하여 주세요. 그녀는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라고 기도하였다. 공동으로 기도하고, 노래하고, 사는 것을 통하여 생명의 근원, 자비와 불과 사랑과 빛인 궁극 존재와 하나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것들의 근원을 경험하고 자기 삶에 담고 이웃에게 전달하려는 맘이 그곳을 방문하여 몇 일을 지난 사람들에게는 생겼다.

그렇게 하여 생명을 충전하거나 그릇에 담고, 아니면 생명의 근원과 끊이지 않고 연결되는 길을 찾고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이것은 바로 로저 슛츠 형제가 위대하여서가 아니라, 그만이 사랑과 생명의 근원과 빛을 받아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받은 사랑과 생명의 빛을 다른 모든 사람, 당신이나 내가 꼭같이 받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누구인가 그곳에서 자기 진정한 집과 같이 느꼈다면, 평안함과 삶의 활력을 느꼈다면, 그 사람 속에 이미 들어 있는 그 근원과 그것이 만났다는 것을 뜻한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다. 그곳에 가야 빛을 받고 사랑을 얻으며 생의 활력을 얻을 수 있기에, 그곳에 자주 가서 새물을 받아와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약과 같은 성격이다. 그것이 아니라 당신이나 나 자신 속에 이미 그것의 근원을 가지고 있고, 그 근원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다만 필요한 것은 그것을 의식하고 연결코드를 찾는 일이다. 그것을 찾기 위하여 한 두 번 그런 기관을 찾을 필요는 있을 것이다. 배우기 위하여. 일단 배운 다음에는 자기 속에 있는 거룩한 장소에서 거룩한 빛을 밝힐 필요가 있다.

로저 슛츠가 그렇게 살았다면, 그가 아닌 다른 누구도 그렇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단순히 사랑과 평화롭게 사는 길 하나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또 다른 길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스스로 찾고 살아야 할 뿐이다.

2)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취임한 이래 전 세계는 평화냐 전쟁이냐 하는 것을 선택하고 생각하여 보는 갈림길에 놓일 때가 많았다. 뉴욕시에 서 있는 세계무역센터가 공격받았을 때 입은 충격과 미국 시민의 자존심의 손상을 회복하는 길을 이런 저런 것에서 찾으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자기들을 공격하는 세력이나 위험을 준다고 판단되는 세력을 완전히 박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이른바 테러와 한 판 승부를 가리는 전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테러는 전쟁으로, 맞대응하여 싸움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부시는 대상세력에 대한 섬멸전쟁을 선언하고 치루었다. 그것이 바로 아프가니스탄 탈리반 정권과 알카에다 세력이요, 이락크의 사담 후세인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었다. 이 두 지역에 대한 전쟁은 약간의 성격은 다르지만, 미국의 자존심에 흠집을 냈다는 것에 대한 보복을 통한 회복전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보복전쟁으로 결코 테러나 보복테러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밝고 밝다. 그런데도 부시는 그 일을 하고 말았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할 때는 유엔을 통하여 많은 나라의 도움과 인정을 받았지만, 이락크를 공격할 때는 영국을 자기편으로 얻었을 뿐 거의 단독전쟁이라 할 만 하였다. 세계의 지성들은 무의미한 전쟁을 중단할 것과 다른 나라들이 그 전쟁에 참여하지 말 것에 입을 모았다.

이른바 이러한 무의미한 전쟁에 이락크 시민들이 많이 희생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전쟁에 참여한 미국의 젊은이들 역시 예상 외로 희생이 많았다. 이 희생자에 신디 쉐한 부인의 아들도 들어 있었다. 정부와 정치가들이나 “악”을 몰아내기 위하여 필요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이 당신 아들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통령은 ‘위대한 미국’을 위하여 영웅처럼 사라져간 그들을 칭송하였지만 의미가 없는 것은 없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 때 신디 쉐한 부인이 대통령 부시로부터 직접 당신 아들이 왜 그 무의미한 전쟁에서 목숨을 잃어야만 했는지를 듣고 싶다고 나선 것이다. 휴가를 즐기는 대통령의 텍사스 농장 앞에서 기다리고 기다렸다. 거기에서 만나주지 않으니 다시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 기다리고 기다렸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고 언론들이 보도하기도 하였다.

그 사람 이외에 누가 그러한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조직하거나 집단을 이루지 않고 혼자서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의 무의미한 희생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였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시위나 아주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성명이나 주장 보다 훨씬 더 적절하고 용기 있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양심을 파고드는 호소였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대통령은 그에게 직접 답을 주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꼭 해주어야 할 숙제다. 또 그러한 무모한 짓을 한 사람을 다시 대통령으로 뽑아 준 미국의 시민들, 특히 신앙양심을 가지고 있다는 보수경향의 교회지도자들의 양심을 깨우는 질문이 될 것이다. 신디 쉐한의 가냘픈 촛불 하나는 두고두고 사람들 속에 있는 촛불에 불을 밝힐 것이 분명하다.

3) 우리들의 세계역사에서는 무수히 많은 전쟁과 공격이 있었다. 그것을 통하여 얻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귀한 생명의 손상이었다. 전쟁을 통하여, 특히 식민지쟁탈 전쟁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자유인에서 노예로 팔렸으며 떨어졌다. 인격을 가진 사람에서 갑자기 아무 것도 아닌 것, 움직이는 막대기로 전락하였다. 시간이 가면서 그것이 제도로 틀을 잡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불행하게 노예로 잡힌 사람들의 후손들은 노예로 태어나고 인격 없는 존재로 살 수밖에 없었다. 무수히 많은 노예해방전쟁과 운동이 있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가장 많은 식민지를 가졌던 영국과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마구잡이로 사냥하여 온 미국의 백인사회에서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잘 알려진 대로 영국과 미국사회에서 교단의 결정으로 노예를 해방한 것은 퀘이커였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위대한 사람들의 철학이나 주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국의 조그마한 인쇄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사람들이 주고받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일곱 명의 퀘이커 친우들이 일하던 인쇄공장에서 우연히 함께 식사하고 차를 마시다가 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노예로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순간 그들에게는 옆에서 같이 일하는 ‘노예’가 노예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들의 양심에 촛불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그것이 점점 퍼지고 퍼져서 퀘이커 전체모임에서 논의되었고, 급기야는 국가의 법이나 다른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믿음의 동지들 차원에서 스스로 노예해방을 선언하고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상당히 강하고 오래도록 노예해방이 성서에 맞는가 하는 문제를 따진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서는 노예에 대하여 나쁘게 논의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였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꼭같은 인격과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물론 사회체계나 관습과 관행은 노예근성이나 다른 사람을 노예로 삼고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겉은 그렇지가 않다. 인종차별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완전해방은 또 다른 불밝힘이 필요할 것이다.

4) 몇 년 전 우리 한국 사회를 온통 촛불의 바다로 만들었던 사건이 있었다. 그것 역시 어느 누구인가의 양심의 불빛이 당겨졌고, 그것이 옆 사람에게 전달이 되어서 그렇게 되었다. 국가권력이나 행정력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속불에 박힌 심지에 불이 당겨졌던 것이다.

우리는 조직을 좋아하고 단체를 만들기를 좋아한다. 심지어는 조직은 힘이라고 말한다. 일을 하기 위하여는 그러한 힘을 가진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당한 부분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 조직이 지나치게 작위롭거나 힘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면 아주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즉 권력투쟁과 폭력행사에 동원되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욱 분명한 것은 우리가 타고난 속에 있는 불빛이 드러나고 빛나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 나의 불빛은 일촉광도 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아주 약한 바람에도 꺼지는 연약한 불빛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살아나는, 언제고 때가 되면 다시 살아나는 꺼질 수 없는 영원한 불빛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시절에 따라서나 우리가 깨닫지 못하여 그 불빛을 됫박이나 그릇으로 덮어놓아 어디에도 비치지 못하게 할 때가 있을 뿐이다. 문제는 자기 불빛을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밝히고 높이 드는 일이다. 그렇게 하여 촛대 위나 등경 위에 타는 불꽃을 세워놓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고나면서 영원한 불을 속에 가지고 있다. 그 불빛이 우리가 사는 동안에 제도나 문화나 교육이나 개인이 가지고 있는 학습된 욕심이라는 됫박으로 가려진다. 그 됫박을 벗겨낼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한 조직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조직은 힘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리는 됫박을 벗겨내어 속에 있는 빛이 비치게 하는 일을 위한 공동으로 하자는 데 필요한 것이라 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무리 단단한 됫박으로 가려져 있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인가 아주 잠깐 틈새가 보일 때가 있다는 점이다. 이 때 빛은 비친다. 바로 그 때 다른 빛이 또 함께 빛나면서 빛과 빛들이 만나는 잔치가 필요하다. 바로 여기에 조직의 의미, 공동체의 의미, 모임의 의미가 있다.

혼자 비치는 빛은 아주 미약하다. 물론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딱딱한 것들 불태우기에는 약하다. 그래서 하나가 비칠 때 다른 것이 또 합하고 합하여 활활 타오르는 횃불로 주변을 밝힐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밝히는 촛불 하나, 그것을 덮어두지 않고 밝히면서, 옆에 있는 또 다른 촛불과 함께 나란히 설 필요가 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아주 많은 곳에서, 아니 곳곳에서, 선한 양심, 아름다운 마음, 깨끗하고 맑은 눈빛, 따뜻하고 지극한 정성, 자기 자신까지도 던질 수 있는 사랑을 만난다. 다만 흩어진 그것들이 지남철에 쇳가루 달라붙듯이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불빛을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밝히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불빛들은 불빛들끼리 모일 것이다.

아무리 연약한 불빛이라도 거대한 흑암이 삼키는 벗은 없기 때문이다. 칠흑 같은 어둠도 성냥개비 한 알로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던가? 다만 한 가지, ‘나는 불빛이다’, ‘내 속에 꺼지지 않는 불빛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남아 있을 뿐이다.(표, 05. 0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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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주박 통신} 88호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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