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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전파된 과정

김민주 (기사입력: 2012/04/28 13:31)  

커피의 원산지 에티오피아 카파

아프리카 동부의 고산지역인 에티오피아는 현생 인류의 기원 지역이기도 하고 많은 재배 식물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바나나 비슷한 엔세테, 기름이 함유된 누그, 국민적인 술을 빚는 손가락 기장, 종자가 작지만 역시 국민적인 빵을 만드는 테프, 마약성 식물인 채트 그리고 커피의 원산지가 바로 에티오피아이다.

최초의 커피에 대한 설은 분분하나 지역적으로 중동의 홍해 연안을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그중 가장 유력한 설은 아프리카 동부인 에티오피아의 고원지대가 원산지라는 것이다. 에티오피아 북부에 지금도 하나의 행정구역인 ‘카파(Kaffa)'라는 지명을 ‘커피’라는 말의 어원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예전에는 카파가 왕국 이름이었고 이 왕국의 수도가 지금도 있는 짐마(Jimma)이다. 카파는 에티오피아어로 신(God)을 의미하는 Ka와 만물이 소생하는 땅을 뜻하는 Afa의 합성어이다. 즉 신이 주신 풍요로운 땅이라는 뜻이다.

에티오피아(당시 이름은 아비시니아) 고원의 카파 지역에서 최초로 발견된 커피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8~9세기 무렵 열 살도 안 된 칼디(Kaldi)라는 목동이 언덕에 염소를 풀어놓고 방목시킨 다음 오후 늦게 염소를 모으려고 갔더니 염소들이 흥분해서 이리저리 날뛰는 게 아닌가. 염소들이 이름 모를 빨간 열매를 먹고서 그렇게 된 것을 알고 칼디도 그 열매를 따먹어 봤는데, 기분이 좋아지고 흥분되고 힘도 솟았다. 칼디는 이 열매를 집에 가지고 와서 마을에 있던 이슬람 사원의 수도승에게 보여주었다. 수도승도 시식해보고 이 열매의 효능을 인정했고, 아랍 상인에 의해 아라비아의 예멘으로 전해졌다.

커피의 유래에는 약간 다른 이야기가 있다. 무대는 에티오피아가 아니라 아라비아 반도의 예멘이다.『커피의 역사』(하인리히 에두어르트 야콥 지음)를 보면 예멘의 시오뎃(Shehodet) 수도원이 등장한다. 이 수도원의 성직자는 염소들이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목동들의 이야기를 듣고 염소들이 먹은 빨간 열매를 볶아서 물에 끓여 성직자들에게 마시게 해보았다. 성직자 역시 염소처럼 흥분감과 각성을 느껴 정신이 훨씬 맑아짐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밤샘 기도를 해야 하는 성직자들은 커피를 자주 마셨다.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떤 것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8~9세기경 커피 원두가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이후 11~12세기경에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반도의 예멘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15세기경부터 예멘 지역에서 재배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왜 에티오피아 카파 지역에서 커피나무가 잘 자랐을까. 커피나무가 잘 자라려면 상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최저기온이 높아야 하고, 최고기온은 30도를 넘지 않고 쾌적해야 한다. 그런데 카피 지역은 해발고도가 1,300~2,100미터 정도의 고산 지역이고 강수량도 1,600밀리미터여서 야생에서 커피가 자라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커피라고 하지 않고 분나(Bunna) 또는 부나(Buna)라고 한다. 분나의 어원에도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원두를 뜻하는 빈(Bean)에서 왔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카피 북부 지역 이름인 부노(Buno)에서 왔다는 설이다. 하여튼 전 세계 사람들이 커피라고 하더라도 커피 원산지 사람들은 분나라고 소리를 높인다. 카파 지방에 살던 갈라(Galla) 부족은 커피열매를 통째로 갈아서 가축의 기름과 섞어 동그랗게 빚어 여행자의 휴대용 식량으로 이용하거나 전사들이 싸움터에 나가기 전에 먹었다고 한다. 이처럼 커피는 음료보다는 음식에 가까웠다.

에티오피아에서 아라비아 예멘으로

7세기 아라비아에서 발흥한 이슬람교는 에티오피아까지 확산되면서 에티오피아의 커피는 예멘으로 전해져 재배되기 시작했다. 즉 에티오피아에서는 커피나무가 야생으로 자랐던 데 반해 예멘에서는 커피나무가 경작되기 시작했다. 예멘 사람들은 커피를 음식이 아니라 생두를 볶아서 나온 원두를 갈아 물을 넣고 끓여 음료로 만들어 마셨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커피를 분나라고 했지만 아랍인들은 커피가 카파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이슬람어로 카베(Kaweh)라고 했다. 청바지 원단이 프랑스 남부의 님(Nime)에서 나왔기 때문에 데님(denim)이라고 하는 것과 이유가 비슷하다.

또 이슬람 사람들은 커피를 ‘잠을 쫓는다’를 의미하는 아랍어인 가하와(Qahwah)라고도 했다. 요즘의 에너지 음료처럼 커피를 마시면 힘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철야 기도와 명상을 많이 해야 하는 이슬람 수도사에게 각성효과가 있는 커피는 졸음을 쫓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인기를 끌었다. 동양에서 불교 승려들이 졸음을 쫓고 정신을 맑게 하려고 차를 음용한 것과 비슷한 논리이다.

무슬림들의 커피 사랑은 각별하여 현대 페르시아 무용담에는 창시자 마호메트가 졸음을 이기려 애쓸 때 천사 가브리엘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음료로 그를 도왔다고 하는데, 그 음료가 바로 커피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다. 또 이슬람은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므로 대용음료로 커피를 마신 것도 커피 확산의 큰 이유로 작용했다.

13세기 무렵에는 아랍 지역에서 커피가 사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일반 대중으로 파고들어 카베 카네(Kaveh Kane)라는 아랍식 커피 하우스가 나타났다. 카베 카네에서 밤 늦게까지 커피를 마시며 장기도 두고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며 시끄럽게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불만을 샀고, 남편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인들의 불만도 컸다. 또 커피는 이슬람교가 금지하는 와인을 연상케 하여 커피가 탄압받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는 정부에서 커피 하우스를 폐쇄한 적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커피 사랑이 대단하여 커피 하우스는 다시 열렸다.

아라비아에서 페르시아, 터키로

마호메트의 성지인 메카에 순례하러 왔다가 커피를 맛본 이슬람 교도들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면서 커피를 가지고 갔기 때문에 페르시아, 이집트, 시리아, 인도로 전파되었다.

아라비아에 인접한 페르시아에는 커피가 일찍 전파되었다. 이곳은 기후적 요인 때문에 커피가 생산되지 않았지만, 커피 하우스 문화는 크게 확산되었다. 페르시아 커피 하우스에서는 정치적인 모임은 하지 않는 대신 환락적인 분위기 때문에 문란한 일이 많이 벌어져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이슬람 교리학자들은 커피 하우스에 매일 보내 손님들과 함께 시, 역사, 법에 관해 교양 있는 대화를 나누도록 하여 커피 하우스 분위기를 다잡았다. 다른 커피 하우스들도 이야기꾼을 고용하여 손님들에게 극장식으로 만담을 제공했다.

16세기 들어 오스만 튀르크가 아라비아 지역을 통일함에 따라 커피문화는 북쪽의 터키로 확산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도 커피는 열렬한 환영을 받아 모든 행사나 의식 이전에 커피를 마실 정도였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커피 열풍을 보고 당시 한 프랑스 여행자는 “콘스탈티노플의 가정에서는 파리에서 와인을 구입하는 데 들이는 돈을 커피 구입에 쓰는 듯하다”라고 적었다.

터키에서 커피 하우스가 처음 열린 시기는 슐레이만 대제(1520-66)가 통치하던 1544년이었다. 알레포 출신의 한 상인이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온 다른 상인과 함께 ‘차이하나’라는 커피 하우스를 이스탄불에 연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분을 전환하고 게임을 하는 한편 지식도 나누었다. 인테리어가 매우 화려하고 분위기가 편안하여 아주 좋은 사교장소였다.

사람들이 모스크사원에 가서 예배하지 않고 커피 하우스에 몰려들자 이슬람 신학자들은 커피를 악마의 음료하고 비난했다. 커피 하우스가 사회 풍속을 문란하게 하고 정부 전복 음모를 꾸미는 장소가 되면서 이슬람 법학자들이 술탄 무라드 4세에게 커피 하우스 폐쇄를 종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탄압과 복구과정은 그 후 유럽에서도 되풀이되었다.

터키에서 유럽으로

터키는 아라비아에는 물론 유럽에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1615년 이슬람 상인들과 무역을 하던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들이 베네치아에 커피를 소개했다. 커피는 처음에는 약으로 인식되었으나 점차 기호식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슬람을 적대시했던 가톨릭 사제들은 커피를 ‘이교도의 음료’ ‘악마의 음료’라고 규탄하며 교황 클레멘스 8세에게 커피를 금지해달라고 탄원한다. 하지만 커피를 마셔본 교황은 신비함에 매료되어 커피를 금지하기는커녕 칭송하게 된다. ‘커피야말로 진정한 가톨릭 교도의 음료’라고 한 것이다. 이 덕분에 커피는 유럽의 상류사회에 급속히 퍼졌다. 커피의 인기에 따라 지금의 카페와 비슷한 커피 하우스들이 생겨났고, 1720년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서 문을 연 ‘카페 플로리안(Florian)'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카페이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 커피를 전한 사람은 상인이나 외교관인데 전쟁 때문에 커피가 전파되기도 했다. 커피가 오스트리아로 대거 전파된 것은 오스만 튀르크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 때문이었다. 1683년 오스만이 빈을 포위하면서 빈이 함락 위기에 처했으나 프란츠 콜시츠키라는 터키 통역관 덕분에 전황이 반전되었다. 이때 터키 군은 대패하여 허둥지둥 도망가는 바람에 많은 전쟁 물자를 그대로 놓고 갈 수밖에 없었다.

포획물 중에 커피 원두가 있었지만 아무도 가치를 모르던 차에 그 가치를 잘 알았던 콜시츠키가 원두를 가지고 빈에서 커피 하우스를 열었다. 하지만 터키인이 마시던 커피가 너무 진해서 오스트리아 사람에게 인기가 없자 필터를 이용해 커피가루에서 커피를 분리하고 우유와 꿀을 넣어 부드럽게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커피 문화를 대단한 수준까지 발전시켰다.

커피 재배지 확산; 인도, 자바, 서인도 제도, 브라질

16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커피는 에티오피아와 아라비아 예멘지역에서만 재배했다. 당시 아랍인들은 커피 종자 유출을 금하기 위해 모든 커피는 볶은 상태에서 수출하게 했다. 커피에 맛을 들인 유럽인은 주요 기호품이 된 커피 묘목을 얻고자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던 중 아랍에서 가장 번성하던 모카 항에 거점을 두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무역상 피터 반 데어 브뢰케는 1616년 커피 묘목 몇 그루를 암스테르담으로 몰래 가져가는 데 성공했다. 네덜란드는 커피 생산으로 큰돈을 벌기 위해 인도 남부의 말라바르와 인도네시아 자바 섬으로 커피 묘목을 이식하여 재배에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인도네시아 자바 커피의 시작이다.

그러면 커피는 어떻게 중남미로 전파되었을까. 1723년 프랑스 장교 가브리엘 마티유 드클리외는 프랑스 정부의 지령을 받고 남미 북쪽에 있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에 커피 묘목 하나를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출발한 배는 항해도중 무풍지대에 갇히고 말았다. 먹을 물이 부족했지만 드클리외는 커피 묘목을 살리려고 자신의 물을 묘목에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1726년에 마르키니크에서 커피를 처음 수확했고, 1732년에는 프랑스로 수출했다. 7년 후 커피 수확량은 7,000톤으로 늘었다. 다른 서인도 제도의 섬들에서도 커피재배가 시작되었고, 1718년 네덜란드 식민지 수리남에서 커피가 재배됨으로써 중남미 대륙의 커피 역사가 시작되었다.

커피 하면 브라질이라 할 만큼 브라질은 세계 최대 커피 생산국이다. 포르투갈령 브라질로 어떻게 커피 묘목이 들어갔을까. 브라질 바로 북쪽에서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기아나(프랑스령)와 수리남(네덜란드령)을 놓고 영토 분쟁을 할 때이다. 양국은 분쟁 중재를 위해 제3자인 포르투갈계 브라질 공무원을 초청했는데, 브라질 공무원 프랜시스코 드 멜로 팔레타는 분쟁 지역에 가서 프랑스 관료 부인과 연애하면서 환심을 사 커피 생두를 몰래 건네받았다. 이때가 1727년이었는데, 이로부터 브라질의 커피생산이 시작되었다.

1893년에는 영국인이 커피 생두를 브라질에서 아프리카의 케냐로 가지고 왔다. 커피 원산지인 에티오피아 바로 옆 나라인 케냐와 탄자니아는 당시 영국령이었고, 커피생산에 매우 적합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처럼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다.

커피 역사를 살펴보면 유럽 전파 이후 커피의 확산은 중상적 제국주의와 맞닿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커피의 상품성이 입증된 후 유럽 각국은 커피 플랜테이션을 통해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 주요 수출품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이나 흑인 노예들이 동원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아시아 국가들이 커피를 접하는 계기 또한 서양세력의 통상압력에 굴복한 이후라는 점도 이런 현상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왜 영국에서 커피문화가 발전하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영국은 유럽에서 커피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였다. 1650년 옥스퍼드에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설립됐다. 그 후 최초의 보험회사 로이드(Lloyd's)도 런던의 한 커피 하우스에서 시작했을 만큼 영국의 커피문화는 근대화의 주요한 무대였다. 그러나 영국은 커피보다 차 중심 문화가 발달한다. 영국은 다른 유럽 제국주의 국가와는 다르게 커피재배에 적당한 식민지를 두지 못한 반면, 커피와 비슷하게 유럽에 도입된 중국의 차(茶)를 대체재로 삼을 수 있었기에 차 문화가 발달했다는 설명이 있다. 물론 이것이 영국 차 문화의 전통을 모두 설명하기엔 부족하겠지만 커피와 사회, 경제의 밀접성의 예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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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김민주『커피 경제학』(서울, 지훈, 2008) 82~92쪽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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