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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시의 평화인가?

김승국 (기사입력: 2014/07/07 07:46)  

Ⅰ. 국가의 기원과 전쟁


국가의 기원에 관해서는 전쟁설(권력설 포함), 경제설, 행복설의 세 가지 설이 있다. 이 세 가지 이설(異說)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즉 전쟁상태 아래서는 경제적으로 충족될 수도 없고 또 행복할 수도 없다. 또 경제적으로 궁핍하면 전쟁이 일어나므로 행복할 수도 없는 것이다.
국가는,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즉 경제적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일차적으로는 국가의 목적이 생명의 수호에 있지만 이차적으로는 경제적 복리에 있다. 한편 플라톤은 전쟁은 국가의 경제적 가치에의 편중(사치)과 인구증가에 따른 늘어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발생한다고 본다. 전쟁에는 이것을 수행하는 자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이 바로 수호자 계급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들은 기개(氣槪)가 발달한 사람인 동시에 철학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누가 적인지를 정확히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일차적으로 전쟁을 방지해서 도시국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 이 때문에 수호자 계급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등장하며, 그리고 도시국가 국민의 욕구충족을 위한 경제적 여건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지배계급부터 생산계급까지 각자의 적성에 맞는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모든 분류가 잘 되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플라톤에 의하면, 국가는 전쟁 방지나, 혹은 경제적인 욕망 충족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최종적인 행복을 증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전쟁의 방지와 경제적 충족이 반드시 선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며, 국가에 있어서 이 선한 삶은 반드시 정의의 원리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행복설은 모든 존재의 근본적인 원인(행복의 충분조건)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위에서 영혼은 충족되기 때문이다. 전쟁설(경제설 포함)은 제1차적 평화이며, 행복설은 제2차적 평화요, 이는 다시 완전한 평화에로 이어져야 한다. 이는 정의의 양측면이요 그들의 완전한 종합이다.
<서강대 철학연구소 편『평화의 철학』(서울, 철학과 현실사, 1995) 20~22쪽>


Ⅱ. 국가의 기원은 전쟁이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국가는 폭력의 독점체이다’고 갈파했다. 폭력(폭력의 극한상황이 전쟁임)을 독점한 국가의 현상이 미국과 한국에서 잘 드러난다.


1. 미국의 영혼(근본)은 전쟁이다


미국은 1979년 이래 이집트에 대해 매년 2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해왔다. 이것은 대부분이 군사원조이다. 이 원조는 미국의 대기업들로부터 무기를 사는데 사용된다. 따라서 실제로는 미국의 해외 원조는 미국의 군산복합체에 대한 복지사업이 된다.


현재의 이집트에서의 내전상태 때문에 오바마 정부는 이집트에 대한 추가 원조를 보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최근 Pew 여론조사 센터가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회답자들의 51%가 이집트에 대한 군사원조 중단을 지지하고, 26%가 원조 계속을 지지했다.


현재 잠정적으로 보류된 “원조”에는 Lockheed Martin사의 F-16 전투기, General Dynamics사의 M1A1 탱크, Boeing사의 ‘아파치’ 공격 헬리콥터가 포함될 것이다. 8.20일자 CBS뉴스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의회가 승인한 대 이집트 원조 10억 달러는 이집트에 직접 가는 것이 아니고 ‘펜실바니아’주의 Archbald 같은 데로 간다. 그곳에 있는 General Dynamics사 공장은 이집트 군에 공급할 M1A1탱크 125대분의 조립용 부품을 제조한다.


Archbald 공장 종업원들이 이 “원조”가 계속되는 것을 절실히 원한다는 것은 짐작할 만하다. Archbald시의 Ed Fairbrother 시장은 이 공장의 일자리들이 “지역사회와 가족들을 부양하는 가장 좋은 일자리라고“ 말한다.


‘펜실바니아’주에는 M1A1 제조에 관여하는 회사가 44개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집트가 탱크를 필요하지 않으며, 많은 조립용 부품들은 군부에 인도된 후에도 상자에 그대로 넣어져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지역사회들은 전쟁지출과 무기 생산에 중독되었다. 전통적인 제조산업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서 해외에 이전됨으로써, 미국의 대부분 지역에서 가장 좋은 일자리는 무기제조 산업이며, 미국산업의 제1 수출품이 무기라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세계적 무기 수출 전략에서 다음 목표는 시리아가 될 수 있다.


미국의 시리아 공격은 적어도 수많은 ‘토마호크’ 크루즈(순항)미사일을 소비할 것이다. 아버지 부시가 1990년대 초에 이라크를 크루즈 미사일로 공격했을 때는 이 미사일 1기가 100만 달러였다. 미국은 최초 공격에서 100기를 사용했다. McDonnell Douglas사 (현재는 Boeing사가 소유)의 '프로리다‘주 Titusville 소재 공장은 이 소비량을 대체하기 위해 주야로 가동했다. 아들 조지 부시가 2003년에 이라크를 공격할 때 먼저 발사한 것은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이었다.


오늘날에는 이와 동일한 미사일은 1기당 300만 불이 소요된다. 따라서 시리아에 비슷한 공격을 하면 이 공장들은 신나게 가동될 것이다. 미국은 살인 국가가 되었다. 미국은 미국의 근로자들이 그들의 가족을 위해 음식물을 식탁에 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술꾼이 술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전쟁을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미국의 영혼(근본)이 전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 출처=Bruce K. Gagnon 『Global Network』 (2013. 8.30)


Ⅲ. 국가 폭력


1998년 독일에서는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의 희생자, 릴리 얀이라는 유대인 의사가 화제가 되었다. 그 이유는 사민당 소속 정치가로서 빌리 브란트 내각에서 연방 법무부 장관까지 역임한 게르하르트 얀이라는 자가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고, 어머니 얀이 학살당한 사실을 자신이 죽은 후에야 공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유품 속에서 자신의 형제들이 1943년과 1944년 사이에 당시 아유슈비츠 수용소에 있던 어머니에게 쓴 편지 250통이 발견되었고 이 편지들은 『상처 입은 영혼의 편지』라는 책이 되어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아들 얀은 왜 어머니의 죽음을 숨겨왔을까? 이 경우 우리식으로 생각한다면 나치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 밝혀졌으므로 희생자의 명예가 회복된 것이고 따라서 숨길 이유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독일사회가 아직 사회적 반성을 충분히 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를 떠나서 피해를 입은 유족들로선 여전히 공개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학살당한 사실을 숨기려 했다는 이야기는 독일만큼의 큰 여론을 일으킬 정도의 것이 아니다. 그만큼 만연되어 있는 현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과거청산에 나름 철저했다고 평가받는 독일조차도 저 지경인 것을 보면, 우리가 갈 길도 한 참 먼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학살당한 인사들의 유족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이 비밀을 알리는 데에 적극적이지 않다. 해결을 바라지만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독일 얀 장관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한국전쟁시기 부역혐의 희생자들은 죽어서라도 결백을 증명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희생자들은 학살당한 후에도 결백을 증명할 수 없었으며, 게다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피해를 당해야 했다. 억울함을 증명하려는 후손들은 또 다시 희생자들이 당한 것과 똑 같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이는 4·19혁명 직후 활동했던 유족들은 5·16 군부쿠데타 세력의 소위 “혁명재판소”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던 사실에서 확인된다.


반면 가해행위에 가담한 자들은 지금까지도 국가 권력을 등에 업고 진실을 숨기고 있다. 이들은 “그렇게 억울하면서 왜 이제까지 가만히 있었느냐? 왜 이제 와서야 말하는 것이냐?”고 묻고 있다. 게다가 진보진영도 웬만해선 말하지 않는다. 희생자들 근처에 가면 진보가 아니라 빨갱이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물론 유족들이 진보진영을 기피하는 정반대의 경우도 있긴 하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양심 있는 자라면 ‘방관자의 오류’를 막기 위해서라도 더 떠들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신기철 「 역사적 사례를 통해 본 국가권력의 희생사례-금정굴 사건 조망」 『[평화만들기(http://peacemaking.kr)』 540호(2013.2.23.)


Ⅳ. 국가주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가는 해방정국에 잠시 형성되었던 사회를 해체하고, 일제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 오던 국가의 사회에 대한 수직적 통제 장치를 다시 부활, 강화시켰다. 그 이후 지역사회, 직능단체, 노동조합, 정당 모든 사회조직은 해체되거나 준국가기구화 되었다. 그래서 정치는 다시 국가와 동일한 것이 되었고, 그 명분은 바로 남북한 간의 군사적 대결이었다. 이 근본구도는 현재까지 변하지 않았다.


국가주의 전통, 전쟁상태, 위기 상태에서 국가에서 ‘정치’는 국가가 독점한다. ‘위기’임을 선포한 국가도 ‘정치’는 오직 국가의 독점물로 간주한다. 국가가 정치를 독점하면 모든 저항활동은 ‘정치’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어 탄압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 국가 외의 실제나 조직을 인정하지 않는 이 ‘위기의 정치’는 정당이든 시민단체든 국가에 대한 일방적 충성을 거부하는 모든 집단을 배제하거나 탄압한다. 국가는 모든 사회영역에 침투하고, 국가를 벗어난 어떤 자율적인 사회영역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정치적 대립, 즉 ‘적과 나’의 대립은 정당 간의 대립, 사회세력 간의 대립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 대 반국가, 국가 대 반란세력(잠재적 반란세력)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한국에서는 노동조합도, 노동3권도 사실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만, 설사 극히 형식적으로 허용되더라도 파업을 하지 않는 조건에서 허용되며, 노조가 파업을 하는 순간 곧바로 국가의 적으로 간주된다. 국가가 파편화된 국민 개인을 수직적으로 지배하는 곳에서 국민의 선택은 시민사회 혹은 정당과의 접촉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일방적으로 조종되거나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김동춘 ‘「연합정치’의 전망과 과제」 『[평화만들기(http://peacemaking.kr)』448호(2011.1.20.)>


Ⅴ. 세월호 참사


청와대는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청와대는 도대체 뭘까요? 국가안보의 컨트롤타워랍니다. 그런데 안보는 안전 보장의 줄임말입니다. 세월호 아이들의 안전은 보장됐던가요? 이미 여러 나라들은 국가의 영토와 주권을 보호 대상으로 하는 전통적 안보관에서 인간의 복지와 안전 문제까지 감싸 안는 비전통 안보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도 바다에서 죽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 국민들이다. 그 국민들이 국가의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 때 국가는 구조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고 세월호는 침몰하였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 안전보장의 포괄적 실패로 규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참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연간 34조원을 국방비로 사용하는 국가가 자국의 앞바다에서 300여명의 국민이 수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출하지 못하였다. 이는 곧 국가가 바로 눈앞에서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현존하는 객관적 위협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 개발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의 목숨이 희생된 적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한순간 국민 300여명의 목숨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한테 안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안보는 ‘안전보장’이란 뜻이다. 객관적으로 국가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위협의 부재 상태가 “국가의 안전이 보장된 상태”라는 뜻이다. 안보정책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생활방식을 보호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민은 세금을 국가에 납부하고 안전보장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안보는 통상 타국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국가의 영토와 주권을 보호하는 것을 일반적 개념으로 사용하였고 이를 ‘전통 안보’라고 정의한다. 한편, 안보를 넓게 정의하는 ‘비전통 안보’라는 개념도 있다. 군사적인 것 이외의 비군사적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생활방식을 보호하는 국가의 행위를 비전통 안보라고 한다. 즉, 전쟁 이외에 인간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재난, 범죄, 환경변화 등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비전통 안보라고 한다. 비전통 안보는 국가가 보호해야 할 국민의 존엄이 강제적으로 공격받을 두려움이 없는 상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전통 안보와 비전통 안보를 합쳐 포괄안보라고 지칭한다.


우리가 북한의 핵, 미사일, 국지도발, 무인기와 같은 전통 안보에 몰입되어 있었던 사이, 우리 해역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국민들의 생명이 산화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포괄안보에 구멍이 난 것이다. 포괄안보의 관점에서 전쟁으로 잃는 군인의 목숨과 평시 재난사고로 인해 지키지 못한 국민의 생명은 동등하게 소중하다.


문제는 이 정부의 안보관이 매우 구태의연하다는 것이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대통령을 안보문제에 관해 직접 보좌하면서 중장기적인 안보전략을 수립하고 국가 위기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이 정부 출범과 함께 발족하였다. 그러나 청와대는 세월호 참사 초기에 국가안보실은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며 사고 수습 과정에서 발을 뺀다. 즉 개념적으로는 청와대 국가안보실의 안보관은 전통 안보만을 담당한다는 뜻이다.


안보의 개념에 관한 최신 논의는 현재 국가의 영토와 주권을 보호 대상으로 하는 전통적 안보에서 인간의 복지나 안전 문제에 비중을 두는 비전통 안보로 확대되고 있으며 이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간 발생하는 군사적 전쟁과 분쟁 이상으로 홍수, 지진, 가뭄과 같은 재난,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 안전사고, 대규모 전염성 질병, 그리고 환경오염 등도 인간의 안보를 위협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이러한 안보 개념은 1994년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행한 ‘인간개발보고서’(the 1994 Human Development Report)가 발표되면서 사실상 비전통 안보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인간안보가 경제, 식량, 보건, 환경, 개인, 공동체 그리고 정치적 안보로 구성되어 있다고 제시한다. 인간안보는 인간의 안전과 존엄성 그리고 권리를 위협하는 요소들을 안보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최근 유엔은 “국가는 인간안보를 실현할 유일한 행위자”라고 규정하기도 하였다. 곧, 국가는 시민들의 일상을 갑작스럽고 고통스럽게 파괴하는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최종건 「군사 안보 뛰어넘어 ‘포괄 안보’로 가자」『한겨레 신문(2014.5.16.)』>


Ⅲ. 세월호 참사를 통해 드러난 ‘국가의 부재’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헌법 34조 6항이 규정한 국가의 역할이다. 그러나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국가의 역할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많아졌다. 깨진 창문 틈 사이로 살려달라는 승객들을 구조하지 않은 해양경찰, 종잇조각이 된 국가 위기 관리 매뉴얼, 산 사람이 아닌 주검을 인양하는 정부의 늑장 대응, 해경 산하 법정단체이자 민간단체인 한국해양구조협회 소속으로 구조에 뛰어들었으나 시신 발견 실적을 부풀리려는 업체를 보며 ‘국가가 재난에 빠진 나를 구조해 줄 것인가’라는 자괴감에 빠져든다.


세월호 침몰사고로 새롭게 드러난 것이 재해 예방과 구조의 민영화 과정이 어느새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최소한의 국가 역할이 민간으로 이양된 것이다. 국가 경찰이 도둑과 살인자를 잡지 않아 민간업체 세콤을 불러야 한다면, 화재가 났을 때 소방서 대신 화재보험회사에 연락을 해야 한다면 어떨까. 사회는 국가 부재를 넘어 인간의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채워질 것이다. 국민 보호와 안전 업무의 민영화는 공동체로서의 국가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
<박유리 「당신도 구조되면 구호 비용 내야 한다」 『한겨레 신문(2014.5.16.)』>


국민을 진정으로 분노하게 만든 것은 세월호 구조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과 ‘국가’의 부재였다. 승객들과 선박을 돌보지 않고 제일 먼저 탈출한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은 스스로 ‘재난의 컨트롤 타워(관제탑)’임을 부정한 청와대의 대응과 판박이거니와, 사고 발생 직후 해양경찰의 초기 대응 실패는 이번 참사가 무엇보다도 인재(人災)임을 보여준다. 정부의 재난관리시스템은 전혀 작동하지 않은 채 해양경찰이 해군 및 민간잠수사의 활동을 방해하고, ‘언딘’이라는 일개 민간업체가 구난과 구조 업무를 사실상 이끌었으니 해양경찰과 해양수산부는 직무유기를 넘어 그 존재가치를 스스로 부정하였다. 이는 그간 정부 자체가 공공성을 허물면서 ‘기업 프렌들리’를 외쳐온 ‘기업국가’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이것도 나라인가?’ 하는 자조가 국민의 분노를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월호 관련 서울대 민주화 교수 협의회 시국선언문(2014.5.20)>


국가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존재하는 것입니까?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들이 거듭해서 묻는 질문입니다.
<세월호 참사 관련 문재인 의원 특별성명(2014.5.20.)>


Ⅳ. ‘도시의 평화’가 하나의 해답이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되어 터져 나오는 ‘국가의 부재’ ‘이것도 나라인가?’ ‘국가란 도대체 무엇입니까?’에 대한 해답을 도시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국가가 국민의 평안•안전-평화를 근본적으로 보장하지 못하므로 국가가 아닌 영역에서 찾아야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러한 영역은 도시(도시의 교외인 농촌을 포괄하는 도시 권역) 밖에 없다. (도시의 교외인 농촌을 포괄하는) 도시 권역의 인구가 전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므로, 국민 개개인의 평안•안전-평화를 국가가 보장하지 못할 경우 도시 권역이 평화보장의 마지막 보루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도시의 평화가 중요해진다. 평화를 지향하는 도시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될 필요가 있다.


Ⅴ. ‘뜨는 도시 지는 국가’ 속에서, 군산시가 ‘뜨는 평화도시’가 되길 희망하며 책 소개


국가 부재의 시대에 평화도시로 뜨는 군산시가 되는게 바람직하다. 세월호 참사로 지는 국가 속에서 뜨는 평화도시 군산이 되길 바라는 뜻에서 아래의 책을 소개한다;


『뜨는 도시 지는 국가』
벤자민 R. 바버 지음, 조은경·최은정 옮김
21세기북스, 2014년


이 책의 원제는 ‘시장들이 세상을 통치한다면(If Mayors Ruled the World)’이다. 시장들이 세상을 통치한다니, 대체 어떻게?
시장들이 세상을 통치하도록 하자는 말은 ‘무능한 국가’ 대신 ‘유능한 도시’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하자는 얘기다. 사회학자이자 정치이론가, 열정적인 사회운동가인 지은이는 무능한 국가와 유능한 도시를 시종일관 대립시킨다. 가령 이런 것이다. “미국은 보편적인 환경 기준치를 준수하는 데 헌신적이지 않으나 로스앤젤레스는 자체 정책을 실시하여 불과 5년 만에 거대한 항만에서 탄소 배출 에너지 사용량을 최대 40%나 감축했다. 항만에서의 탄소 배출량이 로스앤젤레스의 탄소공해 전체의 5분의 2를 차지하던 터라, 이러한 조처 덕분에 도시 전체의 이산화탄소량은 16%나 줄어들 수 있었다.”
환경 문제만이 아니다. 신종 질병과 노동력 이동, 테러, 전쟁 등 세계가 직면한 난제들은 대부분 국경을 초월한다. 기술의 발달로 세계는 이미 ‘지구촌’이라 불릴 만큼 작아졌는데도 국민국가들이 주름잡고 있는 세계는 전 지구적 문제들 앞에서 무력하다. 그것은 국민국가가 민족과 국경에 기반한 ‘주권’이라는 낡은 틀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주권의 역설’이다.
국가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방해하고 방조한다. 예를 들어 미국이 주권 침해를 이유로 거부하는 바람에 사실상 폐기된 국제조약만 해도 부지기수다. “교토의정서, 여성차별철폐협약, 아동권리협약,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화학무기협약, 지뢰금지협약, 국제형사재판소, 해양법” 등이다.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 시장이 총기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전미총기협회(NRA)의 로비가 통하는 국가(연방 대법원)에 가로막혀 좌절했다. 펜실베이니아의 소도시 사우스파예트는 가스 회사의 굴착을 금지하려다 “작업 도시마다 그에 맞는 면허를 따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굴착 회사에 동조하는 주 또는 연방 당국의 방해를 받았다. 시애틀은 2011년 비닐봉투 사용을 금지했는데 비닐산업계가 이에 반발해 주 또는 연방 당국을 이 싸움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기업들의 로비 말고도 지구적 문제에 대해 국가가 무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주도권을 쥐려 하는 국민국가적 속성이다. 이에 반해 도시는 실용적이며 서로 협력한다고 지은이는 역설한다. “기후변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처하는 측면에서 봤을 때, 그 영향과 충격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것은 지방 정부”(지속 가능성을 위한 지역정부, ICLEI의 2011년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대통령들이 거들먹거리며 원칙에 대해 말할 때 시장들은 쓰레기를 줍고 총기 규제 캠페인을 벌인다.”
지은이는 지구적 문제에 먹통이 되어버린 국민국가들을 대신해 도시들의 연대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 격식을 차려야 할 필요도 없다. 시의회 의원인 레이 콜론은 먼저 스페인 세비야로 가서 공공 자전거 대여 프로그램이 얼마나 혁신을 거두고 있는지 봤다. 이어 람 이매뉴얼 시장은 161㎞의 친환경 자전거도로를 시카고의 주요 도로에 놓겠다는 선거 공약을 했고 현재 그 공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장들은 어떻게 세상을 통치할 수 있을까? 지은이는 ‘세계 도시 의회’(전 지구적 시장의회)를 설립하자고 주장한다. 각 도시에서 투표로 선출된 시장 300~400여명으로 이뤄진 일종의 세계 정부다. 세계지방자치단체연합, C40, 시티 프로토콜 같은 네트워크가 이미 구성돼 있기 때문에 세계 도시 의회 구성이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그는 이미 세계의 유명 도시 시장들을 찾아다니며 참여를 설득하고 있다.
지은이 벤자민 R. 바버는 미국 럿거스대학 명예교수이며, 뉴욕시립대 대학원의 ‘자선과 시민사회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는 사회학자이자 정치이론가다. 민주주의자이자 세계주의자인 그가 ‘지구적 문제’를 ‘지구적 차원’에서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는 이 책은 ‘실천적 몽상’이자 ‘몽상적 실천’이라 평할 만하다. 엄존하는 국민국가 중심 질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본질적 한계에 대한 해답은 뚜렷하지 않지만, 최소한 칸트의 영구평화론(세계적 규모의 법적 상태)보다는 더 현실적으로 들린다.
터무니없는 몽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분들에게 지은이는 국가의 역사를 살펴보기를 권한다. 근대의 산물인 국민국가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같은 도시국가가 직면한 ‘규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현했고, 이내 강력해졌지만, 지구촌 시대를 맞아 무력해졌다. 지배구조(거버넌스)는 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대적 과제에 맞게 ‘재발명’해야 하는 것이다.
각 장에 독창적인 시정으로 주목받고 있는 세계의 시장들을 한명씩 소개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뉴욕의 마이클 블룸버그, 팔레르모의 레오루카 오를란도, 런던의 보리스 존슨, 슈투트가르트의 볼프강 슈스터 등 11명의 시장이 나온다. 11번째가 서울의 박원순 시장이다.
<출처=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389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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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도시•평화마을 연구자이다.
* 위의 글은, 군산 YMCA가 2014년 6월 25일에 연 [평화마을 학교]에서 필자가 강연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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